폐암, 간과 뼈 등 몸 곳곳에 전이된 4기
모든 감정에는 유효기간이 있나 보다. 시간이 약이란 그 말처럼 나는 아빠의 병에 점점 무뎌져 갔다.
19년 6월 18일, 아빠는 폐암 확진을 받았다. 간과 뼈 곳곳에 전이되었다. 전이가 되면 4기라고 부른다.
아빠는 19년 7월 8일부터 지금까지 표적치료 중이다. 알레센자라는 약을 12시간 간격으로 아침, 저녁에 먹고 있다. 약을 복용한지는 8개월 정도 되었다.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알레센자라는 표적치료제를 오래도록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면역이 생기면 쓸 수 없다는, 알레센자만큼 좋은 표적치료제가 없다는 글을 읽은 적 있기 때문이다.
의사는 진료를 갈 때마다 암들이 대부분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수술 예정은 없다고 말했다. 내 생각이지만 이미 뼈까지 전이된 이력이 있기 때문에 수술은 의미가 없기 때문일까.
나는 알고 있다. 완치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저 하루라도 더 아빠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옛말이 틀린 것 없다는 경험을 실제로 하게 된다.
모든 감정에는 유효기간이 있나 보다. 시간이 약이란 그 말처럼 나는 아빠의 병에 점점 무뎌져 갔다.
아빠가 암 선고를 받은 날부터 두 달 가까이,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이 나고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졌다.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진정이 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는 당장이라도 아빠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세상 그런 효녀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평소의 효녀가 아닌 딸로 돌아왔다. 나에게는 시간이 약인지 슬픔이 다 나았다.
그런데 아빠의 병은 낫지 않았다. 아빠에게는 시간이 약이 아니다. 아빠는 여전히 폐암이다.
아빠는 아직 건강하신 것인지 여전히 변함없이 고집이 세고 욱하신다. 죽을 때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도 맞는 말일까? 아빠가 오래오래 고집이 세고 욱하시길, 변하지 않기를. 그렇게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아빠의 단점들 조차 이제는 사랑할 수 있어졌다.
어릴 적 아빠에게 상처 받았던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다. 단편적이지만 상처 받은 순간의 기억은 아주 또렷이 남아있다. 어른이 되며 잊으면 좋았을 것을 많이 아파서 여러 면 되새겼는지 좋은 기억들보다 아픈 기억을 더 잊지 못하게 되었다. 그조차도 사랑할 수 있어졌다.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상처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요즘 아빠는 일을 해야겠다며 찾아 나서신다. 생활비를 걱정하는 아빠에게 나만 믿으라 그런 한마디도 못하는 나는 정말 바보 같다. 나는 마치 빨간색으로는 절대로 이름을 쓰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듣기 좋은 거짓을 절대로 말하지 못한다. 이런 내가 밉고 또 그것이 아빠를 닮은 것이라 다시 위로를 받는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의 모습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부모님을 닮고 싶지가 않았는데, 왜냐면 부모님의 장점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며, 나의 장점이 곧 단점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만의 정의가 있는 나는 정의롭지 못하다 생각하면 욱할 때가 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청소를 좋아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습관적으로 상대를 배려하기 때문에 상대는 나를 편해하지만 나는 불편하고 서운해한다.
장점과 단점은 어떤 특별한 성격이나 습관, 취향 등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에 그저 상황에 따라서 장점이 되었다가 단점이 되기도 한다.
결국, 나는 엄마 아빠의 딸자식이었다.
내가 아빠에게 나만 믿으라 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빠도 올해 결혼을 앞둔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 물어보지 않는다.
나는 그게 좋다.
이제는 지옥 같은 슬픔에 잠겨 하루하루를 보내지는 않지만 천천히 지옥으로 걸어가는 기분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처럼,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며 서서히 나이 듦을 느껴가는 것처럼. 아빠와의 이별이 언제가 되든 한 걸음씩 준비할 수 있도록 주어진 이 시간이 나는 지옥 같으면서도 좋다.
힘들 때면 언제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찾아 듣고는 하는데,
이 영상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아 기록해본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못한다면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꾸준히 글을 쓰기로 다시 마음을 잡았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아빠가 나에게 준 이 소중한 시간들을 나는 슬퍼만 하며 보내지 않겠다.
슬픔에는 시간이 약 이래도,
아빠의 병에는 가족의 사랑이 약일 거다.
아빠, 정말 많이 사랑해요.
모든 암 환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암 환자의 보호자분들의 희망과 용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