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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o Apr 09. 2018

세 번째 사랑

사랑을 공부하다

어릴 적 나는 사랑이 대단한 것이라 생각했다.

키스를 하면 종소리를 들을 줄 알았고, 첫사랑이 아니면 죽음이라 생각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만 섹스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일생에 운명의 사랑은 단 하나 정해져 있는 인연이 있을 거라 믿었다. 쉽게 표현하자면, 공주님은 흑마도 갈색 마도 안되고 무조건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야 행복할 것이라는 부질없는 환상을 가진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그런 어린아이가 첫사랑을 보내고 두 번째 사랑을 맞이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짝사랑 3년에 겨우 고백해서 한 달을 연애하였는 데 그마저도 내가 먼저 헤어짐을 말하였다. 나의 감정이 너무 커서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가 아니고 나였기 때문에, 짝사랑보다 힘든 연애를 더는 이어갈 수가 없었다. 비련의 여주인공을 자처한 나는 무려 7년 동안을 남자 하면 첫사랑밖에는 없었다. 다시는 그런 사랑 없을 거라며 남은 인생을 비관했다. 보는 이는 귀엽다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낯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내는 설레고 순수했던 첫사랑이야기이다.


그렇게 7년이 지나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첫사랑처럼 수줍고 귀엽게 웃는 남자였다. 지금 와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것에 매우 약하다. 아기, 강아지, 고민이 많은 동생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수줍게 웃는 남자였다.


나는 그를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첫사랑은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이라는 데, 지난 10년의 첫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사람이 내 진짜 사랑인 것 같다고. 부끄러워 잠시 쓰던 글을 멈춘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정말 그랬다. 그와 나는 캠퍼스 커플이어서 거의 매일 함께했다. 잘생긴 연예인에 별로 감흥이 없는 나였는 데, 내 눈에는 그가 조인성, 정우성보다 잘생겨 보였다. 그와의 결혼이 내 미래로 정해지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와 자주, 결혼 후 함께하는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아들, 딸의 이름도 지었다. 친구보다 더 편했고, 친언니보다 더 의지했고, 엄마 아빠보다 더 사랑했다. 사랑하고 사랑했다. 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사랑에 흠뻑 취한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배운 적도 없었고 공부하려 하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이지.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거라고. 하지만 때로 무지는 독이다. 때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이 더 쉽게, 더 죄책 감 없이, 해맑게, 순수하게, 아무렇지 않게, 잔인하게, 더 잔인하게, 생명을 죽인다.


나는 그의 모든 하루, 그의 모든 것이 갖고 싶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조리 알고 싶었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시기 질투했다. 그의 엄마 아빠에게 인정받고, 그의 누나의 마음을 얻고, 그의 모든 마음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에 여자관계가 많고 그 관계들에 선을 잘 긋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싶고 갖고 싶은 나에게 그것은 적이었다. 


3년의 연애 중 절반은 싸움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그도 서로를 놓지 못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갖고 싶다고 이해했다. 나는 나를 변호하고, 그는 그를 변호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말하며 서로를 공격했다.


그때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장난을 잘 치고, 잘 웃고,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으며,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했다. 그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자주 만취되어 막차를 놓치고, 코너에 몰리면 오히려 화를 내었고, 약속을 자주 지키지 않았고, 나를 배려하지 않으면서 나를 사랑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지고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조심스레 이해한다. 우리는 그때 사랑에 빠진 스스로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가 필요하고 원했던 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받고 싶은 배려와 이해와 사랑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그는 나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가 필요하고 원했던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받고 싶은 배려와 이해와 사랑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에 대하여 노력했지만. 각자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다. 정말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의 미소가, 행복이 소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행복하기 위해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진정 사랑을 위한 노력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진정 그를 위한 사랑이 아닐까.


그로부터 1년 반 정도 그를 잊기 위한 갖은 노력이 있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남자를 만났다. 이놈도, 저놈도 다 아니었다. 나는 자꾸만 그에게로 돌아갔다. 몇 번 연락을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주 반복하던 것은 연락하지 않고 과거의 행복했던 우리로 돌아갔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나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불현듯, 갑자기, 눈이 그치고 봄이었다. (사랑의 시작이란 언제나 그런 것일까)


아아 정말 이 단어는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병신'같게도 세 번째 사랑을 시작할 때에 나는 계속해서 부정했다.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영원한 것은 없으니 계속해서 방어했다. 우리의 이별은 암시되어 있었다. 우리의 미래에는 끝이 있었다. 나는 결혼을 할지 말지 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에는 비혼 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다음에 만날 남자에 대해 슬쩍 꺼내기도 하였다.


나는 너를 가지려 하지 않았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였다. 너의 하루는 온전히 너의 것이고 내가 개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의 생각은 너의 생각이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무조건 이해하였다. 내 생각을 말하긴 했지만 절대로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너의 무관심에 서운해하지 않으려 했고 서운해도 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너를 갖고 싶지 않았지만, 너를 사랑했다. 아니, 너를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방어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깨닫게 된 날부터이다.


그 날은 여느 날과 같이 행복한 데이트를 끝내고 네가 모는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너는 매일매일 나를 데려다주었다(언제나 고맙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아- 이제 뚜벅이는 못 만나는 게 아닌 가 정말. 이렇게 데려다주고 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안 될 텐데..”

“너는 언제나 나와 헤어지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 나 다음 남자에 대해 말하고-”


그때 나는 매우 놀라고, 마음이 아팠다. 헤어짐을 전제하고 다음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자 친구라니.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너는 나에게 이렇게나 잘해주는 데 나는 그것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보답하지도 못하고.


방어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전 사랑이 실패하였다 생각하여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갑옷과 방패와 심지어는 창까지 든, 상처받은 영혼들이여. 무장해제하라! 사랑은 공격이 아니다. 연애는 전쟁이 아니다. 그(또는 그녀)는 적이 아니다. 그가 손에 든 것은 총칼이 아니다. 그가 든 것은 꽃과 따뜻함과 행복 그리고 사랑이다.


과거를 천천히 또 섬세히 돌아보았다. 나를 공격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나를 공격한 것은 나의 소유욕이며 자만이고 나의 무지이다. 나의 행복만을 위하는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를 향한 나의 사랑. 그것이 나를 공격한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온갖 방패와 붕대를 두른다 하여도 내 안에서 공격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그의, 그에 의한, 그를 위한 사랑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깨달은 순간 무한한 사랑이 나를 삼키고 그 없이 살지 못하는 내가 드러났지만 두렵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같은 마음이라 답해주는 그가 내 앞에 있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라고 했다(누군가). 연애는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방법이다. 명심할 것은, 너의 세계를 만나 정복하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세계에서 행복하게 잘 살다가 가끔 너의 세계에 들어가 행복하게 룰루랄라 놀고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와 쉬면 된다. 가끔은 2박 3일, 3박 4일 놀다 와도 될 것이다. 너의 세계는 나에게는 너무나 흥미롭고 따뜻한 곳이라.


나는 아직도 공주가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말이나 궁전 없이도 행복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진정한 사랑을 꿈꾼다. 그렇다고 첫사랑, 두 번째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 또한 사랑이었다. 어린 날에 활활 타서 먼지가 되어버린 무지한 사랑이었다.


세 번째 사랑에서는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 너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너무너무 즐겁다. 나는 점점 똑똑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너의 직업과 일에 대해 알게 되어 너의 하루를 가지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너에게 질문하고 대화하며 너의 생각을 듣게 되어 네가 내 생각으로만 하루를 살진 않더라도 너의 생각은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지 않아도 매일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도 기억해 주는 일, 만나기 전에 뭐할지 뭐 먹을지 고민해주는 일, 서운함을 말하면 그게 아니라 말하다가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고 미안하다 먼저 말해주는 일, 동료와 이야기하다 치아교정 중인 나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치아세정기를 사주는 일, 에둘러 이야기하며 똑띠 바라는 바를 이야기 하지 못할 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지 두 눈을 맞추고 물어봐 주는 일, 요리를 한 후 나온 설거지거리를 보며 자꾸 안 시키면 버릇 든다고 말해주는 일, 바퀴벌레가 알을 깔 수도 있다고 말하면 내가 더 힘들어할까 그저 다음날 잡아 주겠다고 약속해주는 일, 그저 평소처럼 있다가 문득, 내 기분이 어떤지 확인해주는 너의 눈빛까지 모두 모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었다. 너는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알아주고, 내가 받고 싶은 배려와 이해와 사랑을 준다.


첫 번째, 두 번째 사랑에서 배운 것들로 나는 세 번째 사랑을 시작하였다. 일생에 사랑은 여러 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이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길 비밀스레 바라고 있다. 나는 너를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최대한 자주 많이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나의 사랑이다. 사랑한다는 말로 네가 얼마나 행복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나의 행복이기도 하다. 너를 사랑하고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된다면, 이것이 우리를 위한 사랑은 아닐까 하고.


솔직히 말하면, 두 번째 사랑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시작한 세 번째 연애였기에(너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는 두 번째 사랑을 잊고자 세 번째 사랑을 이용하려 든지도 모르겠다. 인생에서나 사랑에서나, 어느 곳이나 어느 상황에서나 선과 악을 명확히 분별할 수 있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만은 선이고 싶다. 처음은 그렇게 불현듯, 갑자기 시작되었으나 정말 감사하게도 너는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의 엔딩은 이별도 결혼도 아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ing 일 것이라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너에게 언젠가는 이 글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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