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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o May 13. 2018

너의 그녀

그녀의 이름은 '전 여자 친구'

너와 사랑을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의 '그'와 이별하는 일이다. 그의 이름은 '전 남자 친구'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과거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다가 이별한 후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지지 않고 다른 사랑을 시작하는 일에 대해서 '환승'이라고 말하며 비난 혹은 조롱한다. 환승은 다른 노선이나 교통수단으로 갈아타는 행위를 말한다. 일정 시간 안으로 환승하게 되면 우리는 요금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완전히 다른 느낌 같지는 않은 게, 이별하고 빠른 시일 내에 다른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면 이별의 슬픔보다는 새로운 사랑의 설렘이 더 크기에 슬픔을 빠르게 잊을 수 있다. 어쩌면 슬픈 감정을 할인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나는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지 1년이 넘고도 몇 달 지나 너를 만났다. 사람들은 이 경우를 환승이라 말하지는 않는 다. 하지만 나는 널 만나게 될 그 당시까지도 이별의 아우라에서 제대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환승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제대로 내리고, 제대로 탑승했다면 말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제대로 내리지도 탑승하지도 못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여기는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아무 나를 만난 것이 너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분명 이별의 아우라 속에서 너를 보았고 '너라면'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그래서 시작했던 것이다.


어쨌든, 한 사람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은 한 가지 의문을 갖게 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냐고. 그런 의문에 대하여 내가 찾은 이해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달이 뜨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해가 뜨거나 지거나 달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리고 해와 달은 아주 다른 성질이다. 달은 지난 밤이며 해는 오늘이다.


나는 하나의 사랑과 이별하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한 미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새로운 사랑을 잡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손 내밀어 준 것은 너였고 나는 겨우 잡았을 뿐이라 용기라고 말하기에 부끄럽지만. 그렇게 나를 너로 채워나갔다. 너덜너덜 텅 빈 마음이 새로운 사람으로 가득 차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 남자 친구의 모든 것이 씻은 듯이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가 떠오르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가끔 떠오르면 눈 한번 깜박이고 깊게 심호흡하고 잘 정리해서 다시 집어넣는다. 그것은 괴로운 일도 아니고 화날 일도, 슬플 일도 아니지만 잠깐 먹먹하기는 하다. 있던 일은 없던 일이 되지는 않기에 나는 내 안의 그를 잘 묻어 두었다.  그것이 나의 이별이다.


그렇게 이별을 잘 정리하고 나니 또 다른 생각이 나를 덮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그'를 잘 묻어두었는 데, 너의 '그녀'는 네 안에 잘 묻혀있는 것인지. 나의 전 연애가 나와 나의 인생에 작지않은 부분을 차지했었기에 너도 그랬을까.


나는 그녀가 두려웠다. 그녀는 나보다 오랜 시간 너와 만났고, 그만큼 너의 기억에 나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붙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떤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나는 완벽한 K.O. 패배였다.


그녀의 실루엣이 어느 정도 보이자,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그리고 질투했다. 너의 예쁜 그 시절 옆에는 그녀가 있었구나. 그때 내가 곁에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너는 그녀와의 연애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고 느끼고 깨달았을 까. 너는 그녀와의 연애에서 많이 달라지고 성장해서 나에게 온 걸까? 그녀와의 연애는 서투르지만 뜨거웠을까?


종종 너에게서 그녀가 뚜렷이 보일 때가 있었다. 잦은 일은 아니어서 나는 그녀가 뚜렷이 보일 때에 너를 안으며 너의 그녀도 함께 안아주었다. 고마웠다. 나 없을 때에 곁에 있어주었구나. 외롭지 않게 따뜻하게 잘 안아주었구나. 웃고 울고 다투고 화해하며 함께 성장해주었구나.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다시 보듬으며 사랑했구나.


사랑하는 나의 너,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어서 나에게 와주었구나.


나는 너의 그녀도 그녀의 흔적도 모두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보면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인정한다. 그 생각받고 더 웃기는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가끔은 그녀에게 못되게 굴었다며 너를 혼내기도 하고, 가끔은 그녀가 너무 했다고 너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며 그녀의 존재를 완벽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존재를 이해하며 너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의 불안감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종종 질투가 고개를 내밀 때는 과거의 그 시간 너의 옆에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는 데, 그 시간 내 옆에도 나의 '그'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질투는 금세 고개를 처박았다.


너는 그런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그녀를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네 덕분이다. 너는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깨끗했다. 너는 담백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가끔 분노나 이해할 수 없다는 정도의 감정이 읽히기도 했다. 최근에는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였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재미있었겠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너는 나의 그에 대해서도 잘 들어주었다. 가끔은 나에게 바보라고 놀리기도 하도, 가끔은 그는 나쁜 놈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내가 못되게 한 이야기는 생략)


너도 나처럼 이별을 어떻게 정리하는지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운동도 하며 혼자의 시간을 갖다가도 그리움에 가슴을 잡고 울었을 것이다. 우리 그렇게 사랑했고 이별했다. 그때의 사랑보다 덜 설레고 덜 뜨거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아쉽지만, 그때의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깊고 넓은 따뜻한 사랑을 할 것이다.


나는 서로 함께 있지 않은 과거를 아쉬워 하기보다 앞으로 함께할 내일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세상 모든 그와 그녀에게

이별을 딛고 새로운 사랑으로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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