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즈음 자리 잡았나
네가 뒤척이다 내 횡격막 즈음에 손을 올렸다. 너의 손 무게가 느껴졌다. 그 무게 탓에 내 심장박동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평소에는 숨 쉬는 것을 잊고 살다가 마스크를 끼면 호흡이 더 예민하게 느껴지고 시원한 공기가 간절해지는 것처럼. 너의 손 무게 탓인지. 알게 되었다. 내 심장박동은 평소에도 다소 빠른 편이었구나. 설레고 긴장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평소의 속도가 이 정도로 빠른 편이구나.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드는 듯했으나 ‘아 슬슬 잠에 빠지고 있다’고 자각하는 순간 도로 깨버렸다. 자주 있는 일이다. 감정에서도 관성의 흐름을 깨는 순간들은 아주 사소하게 흔히 있는 일들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랑이라 들뜬 상태가 지속되는 줄 알았는 데, 무언가 자각하는 순간, 식어 버린 걸까 의심하게 되어 버린다. 이를테면, 내 심장박동이 원래 이렇게 빨랐구나를 자각하는 순간, 내 감정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럴 때가 있다. 비가 오거나, 해피하지 않은 엔딩의 영화를 봤거나, 아니면 호르몬의 변화 이기도 하고, 혹은 어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잠이 오지않는 우울하고 예민한 날이다. 온몸의 털 끝이 나의 반대편으로 곤두 서있다.
그런 때에, 너의 등을 보다 한없이 외롭다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외롭지는 않고 언젠가는 이 등을 보며 외롭다고 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
외로움이란 것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무서운 것이 아니다. 마치 아무 상관도 없는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에 태풍이 들이닥쳤다는 일기 예보 같은 것이다. 그곳에서 사람이 몇 명 죽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 태풍이다. 아주아주 먼 나라의 먼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외로움은 아주아주 무서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끝내기도 하고, 전 애인에게 연락하기도 한다. 그런 무섭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외로움으로 인해 한순간에 벌어진다.
내가 가장 약해져 있는 날, 너의 사랑이 꼭 필요한 날에.
가릴 것 없는 날 땡볕 아래에 서있는 것처럼, 막을 것 없는 날 소나기처럼, 외로움이 쏟아진다.
그것이 내가 아주아주 무서워하는 외로움이다.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그런 날에 이 등을 보면, 쏟아지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맞서야 할 나를 상상해둔다. 그럼 그런 날에 나를 조금은 설득할 수 있어진다.
나에게는 너의 등을 보고도 외롭지 않은 날이 있었다. 마치 두꺼운 벽돌로 단단하게 지은 것 같은 너의 등이 나를 외롭게 만든 것이 아니다. 너의 등을 안고 너의 심장박동, 너의 온기를 느끼며 행복하고 따뜻했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다고,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오는 외로움은 지나가는 소나기와 같은 것이라고 나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중이다. 한 사람을 보려면 사계절은 지나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했다. 너와 나는 설레는 향기 가득한 봄에 만나 뜨겁고 정렬적인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이 하였다. 우리는 지금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따뜻하고 풍족한 것은 겨울이 아니다. 우리는 춥고 배고픈 무채색의 겨울을 맞이 하겠지만, 잡은 손 놓치지 않을 준비를 하고 있다.
생일 선물로 받은 도톰하고 질 좋은 니트, 크리스마스에 함께 산타 머리띠를 하고 찍은 사진, 네가 알아봐 준 중고 카메라를 사서 간 첫 출사 장소 남양주, 제주도 여행에서 처음으로 낸 짜증의 감정, 함께 간 일본여행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경찰서에 간 귀여운 기억. 서로를 생각하며 고른 선물들, 함께 간 장소들, 너와 나눈 감정들, 함께했던 모든 기억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들로 겨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사랑의 유통기한이 2년 즈음이라고 어느 과학자들은 말하겠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일은 우리에게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기에. 나는 그 과학자들이 말하는 호르몬 같은 것들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아주 다양한 세포와 감정과 기억들, 그리고 우리가 나눈 아주 많은 대화와 시간, 생각들. 여튼간에 사랑을 구성하는 것을 정의하는 일은 마치 우주의 끝이 어디인지를 파헤치는 것처럼 끝이 없고 무의미한 일이다. 사랑은 아주아주, 아주아주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사랑이 단순 몇 가지의 호르몬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상해버린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다만, 그런 몇 가지의 호르몬이 나오지 않게 되는 시기에 우리의 관계에 어떤 부분이 변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 내 안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예를 들면, 너와의 사랑이 심장 어느 부근에 있다가 너무 뜨겁기도 하고 또 너무 쿵쾅 거리는 것이 불편해서 좀 더 편하고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그곳이 횡격막 그 어디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너의 손이 내 횡격막에 올라왔을 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네가 내 안에 있다. 설레고 긴장되지 않는 상태의 아주 편하고 안전한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는 횡격막 그 부근에 네가 있다.
네가 내 횡격막에서도 불편해지는 날이 올까. 그러나 나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상상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을 자주 꾸지만, 너와의 일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주의 끝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고 싶지도 않고) 끝을 알게 된다 해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네 옆자리가 편하고 안전하고, 내가 좋아하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