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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o Mar 20. 2019

감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는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

이제, 시간이 지나며 변하는 내 모습을 ‘크다’나 ‘늙다’처럼 단순하게 말할 수 없어졌다. 정확하게 어느 날부터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확실히 변하고 있다.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전과 다르다. 보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보이는 외모나 성격에서는 많이 드러나지 않겠지만, 나는 분명 정말 많이 달라졌다. 성장한 걸까?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걸까?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나쁜 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신한다.


가장 큰 변화.

언제부턴가 내 안의 감정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다. 느낄 수도 없었다. 나의 감정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감정이 보인다는 말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감정이라는 게 당연히 눈에 보일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이 아니면 표현하기에 어렵다. 단순히 느껴지는 것보다 좀 더 또렷하다. 나는 그것을 '보인다'라고 표현하기로 했다.


예전에는 '분노'라는 감정에 나를 쉽게 빼앗기고는 했다. 말을 함부로 뱉고 얼굴이 벌게지며 화를 냈다. 더는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 감정에 나의 표정과 행동, 말과 생각 등을 빼앗긴다. 감정이 내 조종석에 앉으면 그때부터는 기억도 주관적으로 왜곡된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내 모습을 보고 있었던 타인의 기억이 다르다. 진짜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 기억도 타인의 기억에도 나는 감정에 휩싸인 어린아이인 것이다. 마치 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왜 내가 그랬지'라고 할만한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 나를 보는 타인은 내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감정이든 나를 맡기면 안 된다. 그게 '행복'이나 '사랑'이어도 감정에 나를 맡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긍정적인 감정들이라고 후회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에도 즐거운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그 감정에 빠져버리면, 곧 후회할 일을 만들어냈다. 작게는 너무 많이 마셔서 다음날 숙취로 일정을 망치거나, 크게는 말실수를 해서 관계가 틀어지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감정에 나를 맡기면 이런 일들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져 있었다. ‘미안하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과하고 변명해보아도 그것은 분명 나이다. 감정에 나를 뺏긴 나의 모습인 것이다. 더는 변명을 하는 내 모습도 너무 싫었다. 나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고 떠나간 몇몇의 좋은 사람들에게,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나는 어리고 어리석고 내 감정을 컨트롤할 여유도 없고 엉망진창이었다고, 그러나 나를 떠나 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를 바란다.


모든 상황에서 이성적이고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나 잦은 후회를 하며 내가 아닌 ‘감정에 취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이런 생각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감정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 감정은 내면에 있기 때문에 외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사실 자신의 감정이 외적으로 보여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감정은 외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자신은 완전히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런 경우, 타인은 나를 진짜도 가짜도 아닌 제3의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 내면의 감정을 잘 보아야 외적으로도 잘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다. 타인을 속이고 나까지 속이려 들지 말자. 스스로의 감정을 꾸미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그다음에야 타인에게 보여줄 나의 감정에 당당하거나 겸손 할 수 있으며, 오해 없이 진정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감정을 바라보는 것을 계속해서 연습했다. 가장 쉬운 감정은 '분노'이다. 화가 났을 때, 그냥 '이건 뭔가 잘못됐어! 화를 내야 해! 화가 난다!' 하는 생각에 이성을 잃기가 쉽다.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더 큰 화를 부르는 일이다. 내가 화가 나는 이유만 모아 반드시 화가 나야 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때, 짧은 한순간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분노'를 멈추고 머릿속에 딱 한 줄만 띄우면 된다. '나는 지금 화가 나고 있다.' 그리고 내 상태를 상세히 관찰하다. 감정을 버리고 상황을 분석하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을 멈춘다. 마치 개구리를 해부하는 어린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 나를 관찰한다. 숨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발게지고 더워지는 변화를 관찰한다. 반복해서 숨을 깊게 쉬기도 하면서 화가 난 나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침착하게 머릿속에 모든 상황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내가 화가 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나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를 생각하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한다.


그때부터는 나를 뺏기지 않고 내 식대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조금 더 평화롭고 안전하고 행복한 길로 정리할 수 있어진다. 당장에 잘 되지 않는 다고 하더라도 나는 화가 난다고 해서 바로 화를 내지 않는 법칙을 세웠다. 그냥 나는 내 감정을 이성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기분을 '화'로 정하지 않겠다. 소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귀이다. '오늘 내 기분은 행복으로 정한다'처럼 나는 무조건 적으로 순식간에 화에 나를 뺏기지 않는 법칙을 정했다. 화가 나더라도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는 법칙. 어떤 상황이든 모든 화가 사라지고 난 뒤에 표현하는 것이다.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어야 한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반드시 '지금'이 아니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여유도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감정’의 반대말로 ‘이성’을 쓰지만, 나는 '이성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성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차가움과는 아주 멀다. 나는 대부분 따뜻하고 자주 뜨거운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감정을 확인하고 내가 점점 나로 돌아오는 이 과정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것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나는 보통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유이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니까. 나는 아주 뜨겁게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위로한다.


나는 이제껏 정말 많은 실수와 후회를 만들어냈다. 화를 낼 때를 놓쳐 나중에 더 화가 나고 후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원치 않는 모습의 내가 되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분노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조목조목 화를 표현할 수 있어진다. 나름의 성취감이 있는 변화 중에 하나이다. 혹, 화를 내는 중 내가 화를 낸다는 것을 알아채더라도 늦지 않는다. 그 알아챔을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늦지 않았다. 모든 실수는 나의 감정을 방치하는 데에서 벌어진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상황을 만난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언제든 이 벌어진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서 자꾸만 짚고 넘어가게 되면 상황은 계속 안 좋게 흐르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들을 피하는 것도 체질상 안 맞는다. 이상하다. 사람들은 왜 이해하지 못할 상황을 지켜만 보고 올바르게 고칠 생각은 안 하는 걸까. 아무래도 나는 조용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웃음)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종종 행복이나 기쁨, 즐거움, 사랑처럼 긍정적인 감정에서는 방심하고 온몸을 맡기게 된다. ‘에라 모르겠다’이런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 에라 모르겠는 와중에 많은 실수들이 벌어진다.


나처럼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사람들이 세상에 많을까. 그러나 이것을 풀어내야 할 문제로 삼는 사람은 얼마 없지 않을까. 나는 잠깐 아차 싶으면 하늘을 날아다닐 만큼 하이텐션, 또 아차 싶으면 땅속 핵까지 파고드는 우울함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기복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어렵지만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천성이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의 고유한 성질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일까.


나 스스로를 컨트롤하고 제어하는 것의 시작은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잦은 실수와 후회, 내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일. 그것들을 멈추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한다.


나는 나야! 생긴 대로 살 거야! 하는 것도 괜찮다.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좋다. 그러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며 자신을 비련의 주인공으로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란다면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받기를 바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기 위해서, 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내 사랑이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스로 공부하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귀여운 사람의 일기장입니다.

문장이 조금 거칠어 조심스럽지만 발행해봅니다.

공감은 저의 소심함에 용기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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