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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o Mar 17. 2019

인생은 역할극

오늘부터 악역은 내가

어릴 때 보던 애니메이션만큼 선과 악이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있을까.

아니, 사실 어릴 적에는 단순하게 쉽게 생각했으니 그렇게 또렷하게 나누어 구분했던 것이다. 요즘은 어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더라도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다. 선과 악으로 또렷하게 등장하는 가 하면 갑자기 역할이 바뀌어 선은 악이 되고 악은 선이 되는 것이다. 모든 상황과 상황을 샅샅이 캐고 어떤 악역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모두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완벽한 악은 아닐 것이다.


인생은 주고받는 역할극이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선이고 누군가에게는 악이다. 착하다 칭찬받고자 바둥거렸던 착한 아이 콤플렉스(착한 사람 증후군)에 시달리던 그 시절에도 누군가에게는 악이었을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재수 없거나 얄밉거나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연인관계에서나 친구관계에서나 착한 사람 둘이 만나도 한 사람은 나쁜 역할을 맡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법칙이 있다. 심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이 법칙이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나약하고 영리하기도 하여서 언제나 어떤 상황에 처하면 나는 피해자, 너는 가해자라는 상황에 몰입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표면적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네가 잘못했다(네가 나쁘다)인 것이다. 아무리 둘 다 착하고 둘 다 피해자가 만나더라도 각자의 입장에서 착하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이 둘로 갈라지고 대부분 내가 더 착하고 더 피해자인 역할을 맡게 된다.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객관성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런 경우 문제시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기 때문에 이런 논쟁을 펼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논쟁이 되고 문제가 되는 상황들은 대부분 이런 법칙을 가지고 있다. (지극의 개인적인 생각, 그저 재밌게 읽어주세요)


조금 쉽고 냉정하게 이야기해보자. 내가 계속 피해자이고 상대가 계속 나쁜 사람이라면, 내가 나쁜 역할을 맡으면 해결될 수도 있다는 것. 상대가 나에게 악역을 맡지 못하도록 내가 악역이 되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쁜 남자(혹은 나쁜 여자)라면, 헤어져야 하는 나쁜 행동을 계속 참아주면서, 상대가 나에게 악역을 맡을 수 있도록 계속 허용해주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자. 상대가 나에게 악역이 되지 못하도록 단칼에 헤어져 버린다면, 더 이상 나에게 있어 나쁜 역할을 맡지 못할 것이다. 대신에 한 번의 악역은 내가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냉정하게 다신 안 볼 사람으로 정리해 버리는 일은 나쁜 일도 잘못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나는 악역일 수 있다.


내가 나쁜 역할을 맡아야 상대가 착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내가 화를 내고 표현해야 상대가 사과할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계속 참고 이해하고 감싸 안아주는 역할을 계속하다 보면 상대는 계속해서 나에게 참아야 할 일을 만들고 이해해줘야 할 일을 만든다. 누군가 착해지려면 누군가는 나빠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이분법적인 사고 일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도 착하기만 할 순 없고 누구도 나쁘기만 할 순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어릴 적, 내 가족 안에서 피해자였고 착한 아이였다. 공부를 하다가 엄마가 부르면 나가서 일을 하고 방에 들어와서 울었다. 밖에서 티브이를 보던 언니는 시키지 않고 공부하는 나를 불러 시켰다며 언니만 좋아한다 울었다. 나는 착한 아이가 되어 사랑받고 싶었다. 결국, 그런 마음이 내 안에서 나의 가족을 악역으로 만들었다. (엄마는 그저 시켜도 안 하는 언니보다 시키면 하는 나를 불렀을 뿐일 것이다)


내 가족들은 모두 나를 필요에 의해 이용하고 배려하지 않으며 몹쓸 말들만 쏟아 낸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언니만 더 챙기고 걱정하고 아빠는 중립적인 척 하지만 결국에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상황을 방관했고 언니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고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잔인하게 외면했다. 그런 나날들은 사춘기 중학교부터 대학교 입학 전까지 이어졌다.


어느 날부터 나는 착함을 버리기로 한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가족들이 나에게서 악역을 맡으려 할 때마다 나는 그보다 더 강하게 외면했다. 별일 아닌 것에 화를 내며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 나는 연을 끊자고 모질게 말하고 차단해버렸다. 내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왜 도와주지 않냐며 자신의 서운함만을 내세우면 나는 말로는 미안하다 말했지만 더 노력하지 않았다. 명절에 언제나 부엌에서 무슨 일이든 도와했던 내가 졸리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았다. 내가 나쁜 딸이 되었지만, 가족들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작지만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나를 배려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주었다. 도움을 청할 때 조심스럽게 부탁의 어조로 이야기했다. 존중하기 시작했다. 나도 점점 마음을 다시 열 수 있었다.


지금 나와 가족의 관계는 아주 좋다. 나는 가족을 더 이상 원망하지 않는다. 내 가족을 기회주의자라고 욕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상처 받던 나날들.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표현하지 않는 나의 속까지 볼 수 없었던 가족들은 그저 괜찮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고 매정하게 선을 긋고 차갑고 뜨겁게 화를 내기 시작하자 가족들은 나를, 나는 가족들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어졌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누군가 나에게서 악역이 되지 않도록, 최대한 빠르게 악역을 가로챈다. 그것은 회사에서도 적용된다. 무리한 요구를 할 때, 나는 빠르고 간결하게 거절한다. '안돼요.' 또한 나는 되도록 습관처럼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죄송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죄송하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어느 상황에서든 누군가를 함부로 피해자나 가해자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모두의 생각과 입장은 다르기에 내 생각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은 그냥 놔버린다. 당신이 나를 미워하더라도. 적어도 나만은 당신에게 악역을 주고 당신을 섣불리 미워하지 않겠다는 나의 노력,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세상에 악역은 나뿐이다. 모두가 사랑스러운 그저 좋은 사람들.


나에게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가 나에게 어쩌고 저쩌고 했어'이다. 물론, 이렇게나 심플하진 않겠지만. 나는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매번 비슷하게 이야기하게 된다. '그가 너에게 어쩌고 저쩌고 하지 못하도록 하면 되잖아.' 사실은 모든 일들은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단 한 줄에 정리된다. 그가 너에게서 더 나쁜 사람이 되지 못하도록 막으려면 이러니 저러니 다 필요 없다. 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잘라버린다. 아쉬운 게 많아 그럴 수 없다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본인이다. 본인이 필요해서 유지하는 관계라면 굳이 피해자인 척 상대를 나쁘게 욕하는 것이 더 나쁜 일이다. 결국 상대를 나쁘게 말하는 본인이 더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악으로 몰며 정리하지도 못하고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선과 악이라고 쉽게 말했지만, 사실은 세상에는 나쁜 것도 착한 것도 없는 것이다. 그저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얽히고 얽혀 누군가는 나빠지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는 것. 세상의 많은 오해들을 제때, 제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쉽게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나의 세계에서 자꾸만 악역을 맡으려고 한다면, 강하게 저지하자. 저지하는 방법 중에 가장 빠르고 쉽고 깨끗한 방법, 그것은 바로 내가 악역을 맡는 것이다. 거절하지 못하고 끊어내지도 못하고, 어중간히 관계를 유지하며 원하지 않는 괴로운 일을 하며 상대를 나쁘다 나는 가엽다 하지 말자. 빠르고 냉정하게 거침없이 거절하자. 단호하게 물 샐 틈 없이 말하자. 안돼. 나에게서 절대로 악역을 맡지 마.



물론, 말도 안 되게 나빠지란 말이 아님을. 언제나 극단적이고 과한 것은 위험하다. 물음표를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착하고 나쁜 것들을 서로 번갈아 맡으면 된다. 그것이 가장 조화롭고 평화로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 모두가 착하기도 나쁘기도 한 보통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인생에 악역도 주인공도 아닌 그저 소중하고 감칠맛 나는 카메오가 되고 싶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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