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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Apr 23. 2020

19. 세상에서 가장 비싼 노숙

one-way ticket project #19 후르티그루텐 페리


 오슬로에 도착한 첫날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미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베르겐에서 게이랑에르로 가는  '후르티그루텐(hurtigruten)' 페리를 예약하는 것. 최대한 계획하지 않고 해 보는 여행이라고는 해도 출발하고 한 달 남짓 후의 일정이기에 한국에서 미리 준비하려 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알아본 내용과는 달리 홈페이지 그 어느 곳에서도 내가 타려는 구간의 티켓을 예약할 수가 없었다. 짧은 영어로 고객센터에 메일까지 보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고, 어찌어찌하다 알게 된 것이라고는 오슬로 시내에 티켓을 살 수 있는 사무실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뭐, 가보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품은 채 이곳 노르웨이까지 오게 된 것이다. 

 준비 없이 부딪쳐보는 게 진짜 여행의 묘미 아니겠어라는 허세 섞인 마음으로 오긴 했지만 사실은 내심 불안했다. 만약 기대와 달리 티켓을 구하는 게 녹록지 않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니 오슬로에 입성할 날이 다가올수록 온통 신경이 그 티켓에 쏠릴 수밖에. 다행히도 도착하자마자 버선발로 쫓아간 여행자안내센터에서 티켓 구매처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고, 무사히 그 오피스를 찾아 미션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고생해서 - 나름 고생해서 - 구한 나의 티켓이 편안한 여정은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20만원 가까이나 되는 큰돈을 주고 구매한 표였지만, 페리 그 어디에도 내 몸을 누일 작은 침대 하나 허락받지 못했다. 후르티그루텐은 본래 노르웨이 서부 해안을 따라 남북을 오가는 일종의 크루즈 여객선이다. 피오르도 구경하고 중간중간 기항지에도 정박하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은퇴한 유럽의 어르신들이 관광의 목적으로 주로 애용하는 배이기에 기본적으로 가격이 너무 비쌌다. 모르긴 몰라도 노르웨이의 비싼 물가도 한 몫했을 터이고. 그래서 고민 끝에 나름 내 자신과 타협을 본 게 정해진 캐빈(cabin) 없이 승선만 가능한 표를 사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입석표였던 것. 배 안에 있을 소파나 의자로 하룻밤 불편하게 지낸다고 큰 문제 될 건 아니니까. 새벽이슬 맞으면서 하는 노숙도 아니고... 여행하다 보면 이런 재미도 있는 거지 뭐...라고 생각했다. 물론 단순한 여행의 낭만으로 저지르기엔 뱃삯이 너무 비쌌지만 말이다. 


 살다 보면 가끔 스스로도 이해 안 갈 똥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합리적,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도대체가 적절한 명분을 찾기가 힘들고, 누가 봐도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선택을 고집하고 싶을 때가 있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신념이다. 후르티그루텐에 대한 나의 고집이 그랬다. 무사히 구할 수나 있을지 의문스럽던 배표, 제대로 된 숙박도 못하는 몇 십만원짜리 배표, 당연히 다른 이동수단을, 다른 루트를 찾는 게 현명한 상황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편하고 안정된 다른 우회로를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다른 여행자들은 잘 가지도 않는 이동 루트였다. 하지만 꼭 그 배를 타고 게이랑에르 피오르에 입성하고 싶었다. 달빛이 차오른 북극해를 따라 북상하여 어스름이 걷히는 새벽 갑판에 올라 게이랑에르를 맞이하고 싶었다. 이 루트를 따라 가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냥 왜인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아무 실체적 진실도 없는 이상한 낭만에 꽂혀버린 탓에 이해하기 힘든 선택을 한 것이다. 감성적 판단도 아닌, 본능적 선택도 아닌 그냥 이상한 똥고집이다.




 여행을 시작하고 두 번째로 바다 위에서 보내는 밤이지만, 지난번 헬싱키-스톡홀름의 실야라인(silja line)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실야라인이 꽤 시설 좋은 4성급 호텔에 비교된다면, 이번에 탄 후르티그루텐은 깔끔한 비즈니스호텔에 가까운 느낌이랄까(물론 후르티그루텐에도 여러 등급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배에 오르고 보니 역시 소문대로 주변은 온통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뿐이다. 나도 이제 어리다고 불리기엔 조금 멋쩍을 나이지만, 여기선 그냥 한창나이의 젊은이일 뿐이다. 미리 준비해온 빵조각과 음료로 저녁을 해결하고,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에 최적인 장소를 찾아 나만의 잠자리를 꾸며본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뭐하는 짓인가 피식 웃으면서. 

 

 뱃머리에 위치한 전망 좋은 로비에서의 하룻밤은 나름 걱정했던 것보다는 편안했다. 주변에 같은 처지의 승객들도 몇몇 있어 뻘쭘함 없이 자리를 잡고 누울 수 있었다. 오히려 서두르지 않은 탓에 좋은 자리들은 이미 다른 노숙자(?)들에게 선점되어 버릴 정도였다. 그렇게 나름 안락하게 지난밤을 보내서였을까, 아침이 밝아온 게 느껴지지만 마치 제 방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 마냥 꾸무적거려본다. 얼마간 다시 잠들었을까, 잠결에 느껴지는 왜인지 모를 싸한 느낌에 빼꼼히 눈을 떠보니, 이런!! 이미 내 주변은 여유로운 아침을 만끽하고 있는 다른 승객들로 가득하다. 역시 어르신들이라 부지런하신 건가? 순간적으로 시골집에 놀러 온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게으른 늦잠을 자고 일어난 것 같아 민망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올레순(Ålesund)』 에서 잠시 아침 산책을 허락한 배는 다시 뱃머리를 북으로 돌려 내가 내려야 할 게이랑에르로 향한다. 바다가 끝나는 건가 싶더니 이내 배는 가파른 협곡 사이를 나아가고 있다. 곧 도착하겠구나 싶어 진작부터 내릴 준비를 서둘러 보지만, 배는 피오르를 따라 몇 시간을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갔다. 거슬러 올라갔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반지 원정대가 베일에 싸인 비밀의 왕국을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기대했던 청명한 날씨 대신 낮게 드리운 먹구름과 안개가 만들어낸 판타지스러운 분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갑판에 올라 배 양쪽을 오가며 피오르가 만들어놓은 장관에 감탄하고 사진 찍기 바쁘다 보니 어느새 배가 잠시 정박해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지척에 선착장이 보이는데 왜 이런 어중간한데 서있는 것일까, 무언가를 기다라고 있는 걸까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저만치 보이는 게이랑에르를 사진에 담는데만 열중한다. 하자만 이내 곧 등골을 따라 흐르는 싸한 느낌. 그랬다. 이 배는 저 선착장까지 가기엔 너무 커서 이곳에 서있었던 것이다. 후다닥 짐을 챙겨 아래로 내려가 보니 이미 하선할 사람들은 다들 작은 배로 옮겨 탄 후였다. 본인을 찾는지도 모르고 좋다고 구경만 하던 동양에서 온 이 아저씨를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작은 배로 옮겨 타고선 드디어 게이랑에르로 다가간다. 신비로움이 가득한 협곡, 저 깊은 안쪽에 위치한 비밀의 게이랑에르를 향하여. 






[D+40~41]  2018.07.0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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