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토부장 Apr 16. 2020

18.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날 확률

one-way ticket project #18 베르겐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날 확률


 잠결에 들리고 있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

 조금 전 들어온 또 한 명의 여행자가 부산스럽게 짐을 풀기 시작한 소리가 들린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이동에 지쳐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진 나를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깨운 것이다. 아직 해가 떠있는 오후 시간임에도 잠들어 있는 나를 위해 소곤소곤 얘기들을 나누는 걸 보니 그래도 이번 룸메이트는 예의 바른(?) 친구들인가 보다. 그런데 비몽사몽 간 들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귀에 익다. 낯선 곳에서 들리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내 귀에 익을 리는 없고... 그냥 느낌 탓이려니 하고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잠시 동안의 뒤척임.  좀 더 자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낮잠은 이 정도면 됐다, 이제 일어나긴 해야겠다란 생각을 하는데, 아무래도 아까 그 여행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내 귀에 익숙하다. 마침내 일어나기로 마음먹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안경을 주워 쓰고 옆 침대에서 한참 짐을 정리 중인 그를 바라본다.


 “어!! 너...!!!”

 “앗!!!

 “지금 막 들어온 게 너였어?

 “아니 왜 네가 여기에 있어?


 내 오후의 달콤한 낮잠을 깨운 익숙한 목소리는 바로 어제 플롬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독일인 친구였다.


 “너 다음 여행지가 베르겐이었어?

 “응. 너도 베르겐이었던 거야?

 “우리 어제 서로 다음 여행지에 대한 얘기를 안 했었나...?

 “음... 아마 그랬나 봐. 하하!!

 “ .....!! 큭큭!!”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사실 플롬에 있는 거의 유일한 호스텔이었다(조금 벗어난 곳에 하나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통나무로 만들어진 소박한 산장들과 캠핑카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 이곳은 호스텔 본연의 역할보다는 여럿이 모여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불 피우고 고기 구우며 소주 한잔하기 좋은... 아 여긴 유럽이지, 뭐 하여튼 캠핑이 주 목적인 곳이었다. 플롬을 찾는 보통의 배낭여행자들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 송네피오르를 따라 보스를 거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롬에서는 1박을 잘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속소는 6인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둘이 방을 쓰게 되었고, 그 덕에 한참이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었다. 하지만 나름 길었던 대화의 시간 동안 미처 서로의 다음 스케줄에 대하여 말하지는 않았었나 보다. 그냥 서로의 지난 여행 이야기와 플롬에서의 계획에 대해서만 공유했을 뿐이었다. 혹시나 내 영어실력이 짧은 나머지 듣고도 지나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보았지만 분명 우리는 서로에게 묻지 않았었다.  


 단지 스치듯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였지만, 낯선 곳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한 그는 마치 오래된 친구인 양 반갑고 든든하다. 낯선 곳에 홀로 있다는 외로움을 순간 잊을 만큼 큰 의지로 다가온다. 여행자들이 이동하는 동선이라는 게 어찌 보면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한 도시에 있는 수많은 숙소에서 내가 있는 방, 내가 쓰는 침대 옆에 두 번씩이나 짐을 풀게 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 넓은 세상에서 스쳐 지나갈 인연이었을 수도 있는 낯선 이를 낯선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이란 게 과연 얼마나 될까...?





낯선 곳에서 익숙한 이(?)를 만날 확률


 베르겐은 분명 노르웨이 제2의 도시지만, 수도 오슬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오슬로가 모던하고 심플한 현대 북유럽 디자인 감성이 충만한 느낌이었다면, 베르겐은 클래식한 아기자기함이 가득한 중세 북유럽 도시의 느낌이다. 물론 내가 베르겐 전부를 둘러본 것은 아니니 지엽적인 시각에서 오는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중턱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화 같은 가옥들과 좁은 뒷골목 곳곳에서 풍겨오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주는 은근한 여유로움은 분명 오슬로의 그것과는 다르다. 


 베르겐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르게 될 곳이 바로  『브뤼겐(Bryggen) 지구』. 학교 다니면서 세계사 시간에 한 번은 들어봤을 그 이름도 유명한 ‘한자동맹’ 무역의 중심지로 한때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솔직히 이런 역사적 의미는 그냥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뿐이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오래된 목조 가옥 지구라는 타이틀이 붙게 되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나의 호기심이 자극되기에 충분한 스토리다. 

 나만 그러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보통 집을 떠올리면 그려지는 정형화된 모습이 있다. 삼각형 모양의 지붕과 네모난 창문 그리고 네모난 대문. 아마 지금 그려보라고 해도 같은 모습일 수도 있고. 브뤼겐의 건물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같은 모양의 건물들이 나란히 줄지어 선 채로 항구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동화책 속 한 페이지에 있을 법한 삽화 같은 모습으로. 하지만 참 신기하게도 같은 모양의 집들은 그 안에 살았을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처럼 각자 조금씩 달라 보인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지루할 법하게 통일되어 있는 건물도 서로 달라 보이게 하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나 보다.




 가까이 다가간 목조건물들은 자그마한 불씨라도 돌아다니는 날엔 정말 큰 일이라도 벌어질 것 마냥 너무 무방비 상태 같아 보인다. 몇백 년은 족히 되었을 건물들은 생각보다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건물 사이사이 좁은 통로를 오가는 많은 관광객 중에 몰상식한 흡연자 하나 있지 않을까 싶은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건물 사이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풍겨 온 오래된 나무 특유의 냄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월만큼이나 오래되었을 냄새와 색이 바랜 목조 가옥들. 아마도 우리의 경복궁이나 창경궁에 있는 목조 건축물들이 훨씬 오래되었을 수도 있고, 예전에 러시아 키쥐섬에서 보았던, 쇠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 그것들이 훨씬 오래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나 서로 가까이 맞대고 있는 목조 건물 군락 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경험은 처음이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았다면 나는 어느샌가 금세 중세시대 상점 골목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좁은 통로들을 돌아다니다 작은 카페테리아를 하나 발견했다. 마침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생각나던 차에 혹시나 싶은 마음에 들어가 본다. 유럽에는 차가운 커피가 존재하지 않는 카페도 많으니까, 있다 해도 살인적인 노르웨이 물가로 인해 언감생심 침만 꿀꺽 삼키고 되돌아 나올 수도 있고. 카운터 뒤에 걸려있는 메뉴판을 정독하려는 찰나 눈 앞에 상당히 익숙한 물건이 보인다.


 응??!! 불닭볶음면??!!

 그리고 그 옆에는 핵.불닭볶음면??!!


 ‘아니, 대체 왜 네가 거기서 나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조우한 조국의 유명 상품이 잠시 당황스럽다. 파란 눈의 코쟁이들이 한국의 매운맛에 도전하는 영상을 간혹 보기는 했다만, 그 유행이 이 곳까지 퍼져있을 줄이야. 자랑스러운 마음 이전에 당황스러움이 먼저 앞선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왜 라면이 이런 카페에 있는 거야? 주문하면 즉석 해서 끓여주기라도 하는 건가? 엄청 매워서 쉽게 못 먹을 텐데? 대체 저걸 누가 사는 걸까? 간혹 사는 사람이 있으니 팔고 있는 거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무작위로 떠오르다 보니 황당한 기분마저 든다. 불닭볶음면 너는 대체 무슨 사연으로 이 먼 나라 작은 카페에 까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냐. 하긴 나는 무슨 사연으로 어쩌다 이 엉뚱한 장소까지 와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베르겐은 피오르의 안쪽에 위치한 도시답게 앞쪽으로는 북해로 나아가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급경사의 높은 산이 자리 잡고 있다.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산등성이를 따라 다닥다닥 놓여져 있는 집들은 베르겐의 아름다운 볼거리이며, 그 뒤에 위치한 『플뢰위엔(혹은 플뢰엔) 전망대』 에서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도 있다. 베르겐에 오기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도시를 조망하는 전망대에는 많이 올라봤지만, 이 곳 플뢰위엔 산 정상이 선사하는 탁 트인 풍광은 가히 베스트에 꼽을만하다고 생각한다. 눈앞에 펼쳐진 정갈하고 소박한 도시와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짙은 녹음,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쾌청한 하늘의 콜라보는 하루 종일 감상하고 있어도 지루함이 없을듯하다. 문제는 맑아도 너무 맑은 하늘이 선사하는 북유럽 특유의 뙤약볕을 견디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지만. 북유럽에서 만나는 햇볕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것과는 달리 바늘처럼 날아와 살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다. 


 스톡홀름도 그렇고, 베르겐도 그렇고, 원래 이 여행을 구상할 때는 중간에 쉬어가는 도시 정도의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로 가고 싶은 곳들 사이에 놓인 그냥 스쳐 지나가는 도시. 하지만 어찌 된 일이 쉬어가겠다고 마음먹고 온 도시는 이다지도 맘에 쏙 드는 것일까. 결국 욕심을 버리고, 바라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야 보이는 게 있는 건가? 아니면 마음을 비워야 그 안이 무엇인가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일까? 베르겐은 오슬로보다 내가 머릿속에 그려 보았던 노르웨이에 더 가까운 도시다. 만약 누군가 노르웨이에 처음 방문하게 된다면 오슬로보다는 베르겐을 선택하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당신이 꿈꾸는 북유럽의 여유로움과 낭만이 가득한 도시는 바로 베르겐이라고.






[D+38~39]  2018.07.03~04

매거진의 이전글 17. 대체 왜 여행이란 걸 하는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