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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Apr 09. 2020

17. 대체 왜 여행이란 걸 하는 걸까?

one-way ticket project #17 플롬


 헉!!! 큰일 났다!!!


 연착과  캔슬이 일상이라는 유럽 기차에 대한 소문은 수도 없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내가 그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드디어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메인 스팟인 '피오르(혹은 피오르드)'로 향한다는 나의 설렘은 출발부터 난관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오슬로-뮈르달 구간의 일부가 공사 중인 관계로 다른 교통편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갑작스런 소식은 나뿐만 아니라 기차역을 찾은 모든 여행객들을 순간 멘붕에 빠지게 만들었다. 물론 역사 측의 친절한 상황 안내와 긴급한 대안 마련이 있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수십 번도 더 머릿속에 그려본 오슬로-뮈르달-플롬으로 이어질 오늘의 여정이 꼬여버린 건 그토록 기대했던 피오르 여행에 대한 설렘을 반감시켜 버렸다. 계획에 전혀 없던 다른 기차를 타고, 어딘지도 모를 작은 역에 내려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다시 또 어딘지도 모를 역에서 기차로 갈아타는, 지금 돌이켜보면 재미난 에피소드로 기억될 그날 아침의 해프닝도 당시에는 마치 엄마 손을 놓쳐버린 아이 마냥 나를 긴장하게 했었다. 물론 여행이란 게 계획했던 대로 따라가는 것보다 이런 변수를 만났을 때 더 추억이 되긴 하지만 말이다. 


 마침내 뮈르달행 열차에 오른 후 아침부터 이 난리통을 함께 겪은 다른 여행객들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그동안 흐르던 한줄기 식은땀이 마르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내 눈에 들어오는 쾌청한 하늘과 초록빛 가득한 차창 밖 풍경. 어릴 때부터 막연히 그려온, 북유럽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바로 그 정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밀려온다. 


 ‘나는 대체 왜 여행이란 걸 하는 걸까?...’




 언제부턴가 여행을 하다 보면 나처럼 게으르고 정적인 성향의 인간이 어쩌다 여행이란 동적인 활동에 재미를 들였나 가끔 의아해질 때가 있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부지런히 다니고, 보고, 경험하고, 공부하고 그래야 의미가 있는 것일 텐데, 난 가끔 여행 중에도 숙소에 처박혀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 일쑤니까. 그런데 사실 또 막상 그런 생각이 들어도 제대로 그 시간을 즐기지도 못한다. 조금 뒹굴거릴라 치면 남들은 오고 싶어도 쉽사리 오지 못할 이 곳까지 비싼 돈 들여와 놓고는 이게 뭐 하고 있는 짓인지 자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여행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겐 다 각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여행상이 있는 것 같다. 출발 전부터 많이 공부하고 준비해서 자신이 여행한 장소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아가는 걸 지상 과제로 삼는 사람도 있고, 예쁜 인생 사진, 멋진 영상 등을 최대한 많이 담아오는 게 즐거움인 사람, 혹은 그 나라의 맛있다는 음식은 최대한 많이 먹어보는 게 우선인 사람 등등... 다 개개인만의 스타일이 있고 취향이 있다. 

 그렇다면 내 여행의 목적, 스타일, 지향점, 우선순위... 그게 뭐라고 불리던 하여튼 내 여행의 이유는 무엇에 있을까?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번의 여행을 경험하며 내린 나의 결론은 이렇다. 


 넓디넓은 이 세상 수없이 많은 장소 중에

 ‘그곳에 내가 잠시라도 존재했었다는 게 좋을 뿐’


 이것이 내 여행의 이유다. 내 삶을 채우고 있는 일분일초의 수많은 순간, 그 수많은 순간들 중 어느 하나에 새로운 세상이 더해질 수 있다면, 나의 여행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삶의 그토록 많은 시간들이 단지 몇 곳의 정해진 장소들로 채워진 채 마무리되는 것은 너무너무 지루하고 안타깝다. 그래서 난 계속 새로운 곳을 갈구하고 그곳을 찾아 여행을 이어간다.


 


 뭐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역마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한 곳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삶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던가. 적어도 내가 바라는 것은 떠돌이의 삶은 아니다. 그러니 역마살이라는 단어로 정의되어 버리기에는 뭔가 조금 다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난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타입이니까 (이건 모두들 그렇게 인정하는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아니면 안정을 추구하되 모험을 갈구하는 이율배반적 성향이 있는 건지도. 떠돌이, 방랑, 역마살 이런 단어의 분류에 귀속시키기보다는 그냥 경험의 다양성을 즐기는 타입인 것으로 정의해두고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장소를 경험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내가 미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재미. 물론 그 정도의 짧고 단편적인 경험과 재미들이 내 삶에 실질적으로 가져다주는 이익은 없을 테지만 , 왔노라, 보았노라, 느꼈노라 이 세 가지 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그 의미가 크다. 


 그렇게 한참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기차는 뮈르달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뮈르달 역에서 30분 정도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사진도 찍고, 주변 풍경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아침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부리나케 뜀박질을 한 후에야 겨우 새로운 열차에 오를 수 있다. 일반열차라기보다는 관광열차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플롬행 열차는 내부가 나무 재질로 되어 있어 참으로 클래식하고 이색적이다. 중간에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Kjosfossen』 폭포의 우렁찬 소리와 열차를 집어삼킬 듯 세차게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놀라고,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빨간 드레스 여인의 퍼포먼스를 보며 북유럽 요정을 떠올리고 나니 어느덧 열차는 깊은 산속의 작은 마을 『플롬』에 도착했다.





[D+37]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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