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way ticket project #04 시베리아 횡단열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가 출발하고 4일째.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한결같다. 메트로놈처럼 똑딱이는 선로의 덜컹거림과 차창 밖 시베리아 평원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하는 똑같은 승객들. 기차는 분명히 달리고 있지만 시공간은 멈추어 있다. 하지만 여느 날처럼 시작한 하루에 점심 무렵 술렁이기 시작한 객차 안 승객들로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보통은 한산하던 복도가 무언가를 마중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드디어 그 유명한 바이칼 호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차가 바이칼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 지 이미 3시간이 넘어간다. 가도 가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드넓은 호수.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는 어느새 내가 시베리아의 한 복판에 있음을 잊게 만든다. 물안개 마저 피어오른 호수는 이내 신비로운 전설 속으로 기차를 데려다 놓았다.
이곳 사람들도 이 광경은 익숙하지 않은 듯 모두들 처음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든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두고 싶지만, 바이칼의 경이로움은 사사로운 인간의 욕심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몇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바이칼의 마법으로부터 탈출한 기차는 이제 숲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네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걸 침엽수림이라고 하는 걸까. 아마도 기차는 이제 타이가지대로 들어온 것 같다. 오늘 하루에만 천변만화한 3가지 풍광에 놓이고 보니 - 아침은 광활한 평원, 점심은 끝이 안 보이는 호수 그리고 오후에는 침엽수 가득한 숲 속 - 거대한 시베리아 제국의 스펙터클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지금껏 기차가 달리고 있어도 이 땅의 크기가 그렇게 체감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하루하루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연과 기후, 풍경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고, 그러한 변화를 깨닫게 되면 지구 둘레의 4분의 1 가까이 된다는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놀라게 된다.
내가 달려가고 있음을 인지할 수 없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 안에서의 가장 신비로운 경험은 '현재시각'이란 단어가 부질없어지는 것이다. 기차 내에 표시되는 모든 시간은 모스크바 기준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어차피 현재 내가 존재하고 있는 곳의 시점과 맞지 않는다. 기차는 계속 달려 나가고 있음으로 시간대도 자꾸 변해간다. 그래서인지 심지어 핸드폰이 보여주는 시간마저도 자꾸 오락가락한다. 그렇게 대체 지금이 몇 시인 건지... 를 알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새 숫자로 보여지는 시간이란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냥 해가 뜨면 아침인 거고, 머리 위에 있으면 낮인 거다. 어느 순간 해는 지기 시작하고, 이내 어두워지면 밤인 거다. 자연이 알려주는 '때'만이 있을 뿐 숫자가 알려주는 '때'는 적어도 이 기차 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가 하루를 사는 기준인 '시간'이란 것도 어찌 보면 우리 스스로가 만든 족쇄이자 굴레일 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 달라지는 순간이동의 경험은 비행기를 타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시간이 뒤섞여가는 혼란의 세상에 존재하는 경험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만이 유일할 것이다.
[D+5] 2018.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