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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May 05. 2019

5.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하는 가장 멋진 일

one-way ticket project #05 시베리아 횡단열차


01


열차에서 보내야 할 일주일도 어느덧 절반을 넘어가고, 이제는 이 안에서의 생활도 조금씩 익숙해져 간다. 열차의 생활은 마치 시골에서의 그것과 같아서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드는 지극히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객차 안 모든 사람들이 6시 전후가 되면 일어나고, 10시 즈음이면 잠자리에 드는 지나치게(?) 규칙적인 생활. 하지만 원래의 내 자신이 그러한 패턴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일어나는 시간은 다른 이들에게 맞춰져도 잠드는 시간은 언제나 2~3시간 정도 늦어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만 주어진 그 시간이 열차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멋진 순간이다. 세상의 모든 빛은 사라지고 오직 달빛만이 남아있는 시간. 세상의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기차의 덜컹임만이 들리는 시간.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창밖에 나의 모든 잡념을 내어주고, 오직 스쳐 지나가는 어둠만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 시간이야 말로 횡단열차에서의 가장 멋진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는 열차는 세상 모두가 고요히 잠든 시간에 만나는 작은 역 조차 외면하지 않는다. 오가는 사람없이 처연한 가로등만이 반기는 작은 역. 깊은 밤 정차한 어딘지 모를 작은 역에 내려 밤바람을 맞아보는 일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만이 선사해줄 수 있는 낭만이다. 






02


멍때리다.


분명 예전에는 없던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말을 대신할 만한 더 좋은 표현이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어떤 미동도 없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일. 최근에야 생겨난 행동은 아닐텐데... 그 표현이 없었을때도 나는 이것을 가장 좋아했었다. 

적어도 이 열차에 올라있는 일주일동안은 원없이 할 줄 알았다. 멍때리는 일을... 그렇지만 맘먹고 시작한 멍때리기는 의외로 오래가지 못한다. 작동도 하지 않는 애꿎은 핸드폰을 자꾸 만지작거리다 이내 졸음이 몰려와 드러눕기 일수다. 스쳐가는 창밖을 보며 슬며시 잠드는 달콤한 낮잠이야 말로 횡단열차 여행의 행복이겠지만, 핸드폰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동안 적어도 모바일 중독이란 측면에서만큼은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어느새 현대문명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창밖에 지나가는 멋들어진 경취에 중독되지 못하고, 이 조그만 IT기기 속 그림들을 자꾸 들여다 보게되니 말이다. 

분명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몇시간이고 까페 창밖을 바라보며 무념무상에 잠겼었고, 몇시간이고 공원 벤치에 앉아 초점없는 눈동자로 앉아있었다. 그 시간들이 그 느낌들이 너무 좋았다.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해준 이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언젠가부터 조금씩 드물게 되었지만 그냥 바쁘게 지내는 탓에 잠시 소홀해졌을뿐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다시 즐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허락 받을 수 없었던 그동안의 시간들은 나를 바꾸어 놓았고, 이제는 제일 사랑했던 일마저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그런 어른이 되어버렸다.


막상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자 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D+6~7] 2018.0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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