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여수

여름

by 은서

기말고사와 과제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을 가까스로 내려놓고, 스스로도 무리인 줄은 알면서도 여수로 떠났다. 사실 이 여행이 정말 잘한 선택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회사 업무와 동시에, 한 학기를 온전히 견뎌낸 내게, 이 며칠간의 휴식만큼은 정당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방학이라는 이름 앞에서 나는 잠시라도 삶의 속도를 늦추고 싶었고, 학기 중 내내 차곡차곡 쌓여만 갔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조용히 들여다볼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은 충동적으로, 조금은 애써 계획한 척하며, 리프레시라는 단어 하나를 끌어안고 이곳 여수로 내려오게 되었다.


장마는 예정보다 이르게 시작되었고, 6월 중순이면 비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빗속에서 조용히 젖어갔다. 오전 9시 기차를 탈까 잠시 망설이다, 혹시라도 오전에 회사 쪽에서 연락이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시간을 미뤘고, 결국 Flex Friday임에도 불구하고 오후 1시 무렵 걸려온 전화에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챙겨 온 스스로의 판단을 다행이라 여겼다. 조용한 기차 안에서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방향성을 잡으며, 이게 정말 휴식인지, 그저 장소만 옮긴 일상의 연장선인지 잠깐 혼란스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러는 사이 또 하나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나를 찾아왔다.


기차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대화 끝에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교환하게 되었다. 물론 그건 내 계정이 아닌, 강아지 인스타였지만. 여행 초입부터 뜻밖의 인연과 상황들이 겹치며, 여수는 나에게 일종의 시트콤 같은 하루를 선물했다. 택시 기사님은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으시고 나에게 지도를 열어보라 했고, 처음 오는 여행지에서 길을 아느냐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이상하리만큼 당황스러운 순간들이 반복됐지만, 그러한 혼란조차도 이 도시에선 어쩐지 여유롭고 웃긴 일처럼 여겨졌다.


숙소 근처에서 게장을 든든히 먹고, 그날 밤은 깊게 잠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서 푹 잔다는 건, 그만큼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는 뜻이겠지. 다음 날 아침, 커피 한 잔을 들고 노트북을 펼쳐 밀린 일을 정리했다. 예상보다 조금 수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세 시간 넘게 쉬지 않고 집중한 터라 뒷목이 뻐근했다. 숙소 1층의 한식 뷔페에서 대충 요기를 하고, 예쁜 이름의 피읖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의 분위기는 훌륭했지만, 가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2,000원짜리 땅콩 띠아망과 7,000원짜리 아메리카노. 낯선 도시에서 마시는 커피는 때로 여행의 일부라기보다는 인생의 물가 공부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여행의 목적은 결국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정리하는 데 있었기에, 그런 자잘한 에피소드들조차도 내게는 소중한 조각들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조금 천천히 숨을 고르고 싶었고, 조금 가볍게 다시 나를 정돈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동안 미뤄둔 나의 방향성을 다시 짚어보고 싶었다. 논문을 조금씩 써보는 것도, 오래 미뤘던 블로그를 시작해보는 것도, 친구가 권한 두바이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도, 모두 이번 방학 동안 내가 해보고 싶은 일들이다. 수영은 화·목반으로 바꿔보려 하고, 운동도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뱃살과 팔뚝살은 요즘 유난히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어쩌면 그것이 지금 이 글의 다음 문단과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여행을 오면서 나는, 자꾸 떠오르는 그 사람의 얼굴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간이 달라지고, 일상이 바뀌면 마음도 조금은 가라앉을 거라 믿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낯선 도시의 풍경 속에서 오히려 더 자주, 더 선명하게 그가 떠오른다.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가을이와 걷고 있을 때, 멍하니 창밖의 비를 바라볼 때, 그 모든 순간에 그는 마치 내 곁에 앉아 있는 것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그에 대한 감정이 ‘좋아함’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인정한다. 하지만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있고, 누구에게나 환하게 웃고, 늘 여유롭게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나 혼자만의 감정을 들킨다는 것은 지금의 이 편안한 거리마저 깨뜨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나는 고백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게 고백하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지금처럼, 멀찍이서 웃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그 충분함이 내겐 때때로 너무 모자람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혼자 좋아한다는 것은, 때로는 깊이 울리는 조용한 고백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는 지금 누군가를 진심으로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마음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 감정이 언젠가 사라질지, 혹은 더 단단하게 자리 잡을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 여행의 어느 순간에도 나는 그를 잊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금은 우습고, 조금은 서글프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왔는데, 오히려 감정이 더 진해진 것 같아서. 그러나 이 감정조차도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한 조각이라면, 나는 그것마저도 외면하지 않기로 한다. 비 오는 여수의 어느 오후, 익숙하지 않은 택시와 비싼 커피, 낯선 도시의 숨결과 함께,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를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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