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2일 내내 이어졌던 비는 끝내 그쳤고, 마치 여행의 마지막을 알고 기다렸다는 듯, 일요일 아침의 하늘은 오랜만에 투명하게 맑았다. 바다를 향해 열린 창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은 오래 눌려 있던 마음을 아주 천천히, 조용히 데우는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감각이 희미한 아쉬움처럼 배어 있는 아침이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장어탕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여운을 입가에 남기며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도, 버스를 타고 향일암으로 향해보기로 했다. 언덕이 많고 계단이 많다기에 망설였지만,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 하나에 마음을 얹었다. 가을이와 함께 탄 아침 9시 10분 버스는 출근길이 아닌 느릿한 바다 마을의 리듬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길게 이어진 버스 여정이 끝나고 내린 순간, 나는 꽤 가파르고 숨이 찰 정도로 고된 언덕 앞에 서게 되었다. 아직 체구가 작은 가을이에게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고, 나 역시 무거운 숨을 삼키며 오르막을 천천히 올랐다. 경사지를 택한 건, 계단을 오르며 가을이를 품에 안기엔 내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정상을 가까스로 올라서자, 한눈에 펼쳐지는 짧지만 선명한 바닷빛과 절벽 위의 풍경이 우리를 반겼고, 나는 어쩌면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까지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짧지만 꽤 힘겹게 걸어 오른 그 길 위에서 식혜 한 잔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던 음료가, 이 여름날의 땀과 호흡 사이로 이상하게 간절해졌다는 것 자체가 이 여행이 낯설고 새롭다는 방증 같았다.
11시쯤 다시 버스를 타고 향한 곳은 돌산공원이었다. 무더운 대낮의 햇살이 공원을 오래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되어 곧장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향했고, 편도로 14,000원이라는 가격에 잠시 주춤했지만,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그 길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가을이는 케이블카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잔잔한 흥분을 품었고, 나는 그 작은 생명이 무엇에 기뻐하고 어떤 풍경에 반응하는지를 조용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작년 이맘때 전 남자친구와 푸꾸옥에서 탔던 케이블카가 문득 떠오르긴 했지만, 지나간 계절은 그대로 지나가도록 두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저 무탈하기만을 빌었다.
내려선 지점엔 우연처럼 케리커처를 그려주는 작가가 있었고, 무심코 가을이와 함께 들어가 나란히 그림을 맡겼다. 완성된 그림은 내가 아닌 것처럼 너무 예쁘고, 다소 과장된 듯한 웃음마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이 여행의 기념으로, 그 과장이 주는 밝은 인상이 가장 적절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수에서의 택시는 어쩐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오동도에서 탑승한 택시는 바다김밥으로 가달라는 내 말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고, 기사님은 네이버 지도를 켰는지도 모른 채 이상한 곳에 내리라고 하셨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망설이다가도 ‘이것도 여수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체념 섞인 유연함으로 나를 설득했다.
도착한 그곳은 예상 밖의 벽화마을이었다. 너무 덥고, 원래 가려던 곳이 아니었지만, 이왕 이리 된 김에 저장해둔 카페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가을이의 식사도 챙겨주었다. 예쁘게 꾸며진 카페의 공기가 조금은 내 마음을 다시 다독였다. 바다김밥까지는 10분 정도 걸어가야 했고, 택시 아저씨를 떠올리며 어이없어 하다가도, 햇빛에 반짝이는 골목의 담장을 따라 걷는 동안 그마저도 금세 잊혔다. 김밥을 주문하고, 근처 포토이즘 부스에서 강아지와 함께 즉석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나는 조금 지쳐 있었고, 가을이는 여전히 해맑았지만, 그 조합이 이상하게 따뜻하고 다정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
돌아오는 버스는 운 좋게 바로 도착했고, 숙소로 돌아온 뒤 조용한 방 안에서 김밥을 먹으며 인터넷 설교를 들었다. 조금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했고, 그렇게 잠깐 누워 숨을 돌리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일정을 준비했다. 가을이를 깨워, 경도와 여수 앞바다를 마주한 마지막 해변을 함께 걷기로 했다.
경도의 바람은 낮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고, 석양을 향해 기울어가는 오후의 공기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이 계절, 이 여행, 이 순간이 머지않아 지나가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자꾸만 이 길의 끝을 늦추고 싶어졌다. 강아지와 단둘이 낯선 해변을 걷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완전한 하루였다.
이제 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쌓인 빨래와 청소, 그리고 회사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도 이 몇 날 며칠을 억지로라도 리프레시 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잘한 일이라 말해주고 싶다. 나는 안다. 며칠 뒤면 분명 또다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 가을이 밥을 주고, 내 마음도 천천히 정돈하고, 다시 나를 살아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