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누구를 참 많이도 좋아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나 자신에게 선명하게 다가올 때. 그 감정을 느낄 당시에는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내가 그만큼 애쓰고 있다는 것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매번 마음을 내어주고 웃으며 다가갔던 그 시간이, 문득 어느 날 조용히 돌아보면 가만히 가슴 안에서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상자 안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사진처럼, 지금은 흐릿해졌지만 한때는 분명 눈이 부셨던 순간들. 그 안에 나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늘 좀 늦게 깨닫는다.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은 참 무심했다. 나에게 무엇을 해준 기억보다, 내가 무엇을 참았고, 얼마나 이해하려 했으며, 얼마나 스스로를 줄이며 다가갔는지의 기억이 더 많았다. 다정한 척 말은 했지만, 행동은 늘 느렸고, 약속은 자주 잊혔으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떤 날은 맑다가도, 또 어떤 날은 너무 낯설었다. 나는 매번 스스로를 달래며, ‘이 정도쯤은 괜찮아’라고 말했고, 그 사람을 변호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무심한 말과 침묵조차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다. 내가 그렇게 한 건, 아마도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애씀은, 사실 혼자 하는 관계 안에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는 걸.
좋은 사람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다정하게 대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성실하게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같은 무게로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각자의 리듬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끝내, 누구에게도 다정할 줄 모르는 채로 살아가기도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자꾸만 더 좋은 사람이 되어달라며 그 사람을 향해 마음을 던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기대는 결국 나를 향해 돌아왔고, 무심하게 반사된 그 마음들 속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올바름을 방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사랑과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무성의하다고 해서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할 이유는 없고, 상대가 건성으로 다가온다고 해서 내가 더 깊이 감정을 부여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이 가벼운 말로 던진 한 마디에 내가 며칠씩 잠을 설쳐가며 의미를 찾고, 무관심한 태도 속에서 작은 단서를 끄집어내려 애쓴 시간들—그 모든 노력은 상대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감정의 무게였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결국, 스스로를 위해 그 관계를 놓았다. 나를 너무 쉽게 바라보고, 너무 가볍게 취급했던 사람을 끝내 놓는 건 버림이 아니라 회복이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그 마음은 결국 나 하나만의 것이었고, 나는 그걸 알고도 외면한 채 조금 더 기다려보려 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관계란 혼자서 밀고 당긴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진심일 때에만 그 무게가 평형을 이루는 것이라는 진실은 언제나 같았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내가 다했기에, 내가 최선을 다했기에, 그리워할 이유도, 후회할 이유도 없다. 내 마음을 그만큼 건넨 나는 오히려 잘한 것이다. 어떤 사랑은, 오직 내 안에서만 존재했다가 조용히 끝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실패는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나 자신을 더 많이 아프게 했던 시간들을 끝내는 일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좋은 사람은 내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고, 약속보다 책임이 선명하고, 따뜻함이 꾸밈 없이 스며든 그런 사람은, 억지로 바꾸려 애쓰지 않아도 처음부터 그랬던 사람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사람과 함께 웃고 싶은 삶을 살아가고 싶다.
더는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스스로를 덜어내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아주는 그런 사람. 언젠가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더 평온한 마음으로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지금은 그저, 내 마음을 조용히 잘 보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