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이 조금은 진심이었다면

여름

by 은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이미 어떤 선택지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나를 어디로 이끌게 될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처음부터 가볍게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가볍게 끝내는 방식에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낯선 감정이었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었고,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선택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와의 대화를 마주할 때마다 조금씩 설렘과 긴장 사이를 오갔다. 그게 좋았다. 또, 그게 무서웠다.

내가 먼저 커피를 마시자고 말했던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뭔가 자꾸 마음이 동했다. 취향이 비슷했고, 대화가 부드럽게 흘렀으며, 우연히 뿌린 향수마저 내가 오래 좋아하던 잔향과 겹쳤다. 이건 조금 이상하리만치 호감이 겹치는 순간들이었다.


동시에 그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 눈동자 안에서 나의 위치를 자꾸 확인하고 있었고, 이 관계의 온도를 나 혼자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 인연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더 깊어지면 안 될 관계라서 그랬는지는 끝내 분간하지 못한 채.

우리는 이름을 알았고, 음악 취향을 공유했고, 웃는 포인트가 비슷했지만, 그가 살아온 시간과 가치, 그리고 그의 주변 세계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를 알고 난 뒤, 내 마음 어딘가에서 아주 작고 조용한 문이 하나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에게 나는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지만 아주 현실적인 불안이었다.


나는 빠르게 결혼을 생각해야 하고, 내년이면 더 늦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것은 단지 사랑이 아니라 삶의 조건과도 부딪혀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아직 젊었고, 아직은 자유로웠고, 어쩌면 나는 그가 상상하던 ‘함께’라는 단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는 아마도, 지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관계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정서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물리적 친밀감이 아무 의미 없게 느껴지는 사람이었고, 감정이 깊어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달쯤의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 내가 먼저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 관계가 더 이상 가볍게 흘러가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가 무겁게 걸어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 둘 다 잠시 숨을 고를 틈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인으로 남자고, 라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레 수긍했다.

이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좀더 허전했다. 끝나야 할 때 끝났다는 건 안다. 맞는 결정이었고, 서로를 배려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아쉬웠다. 감정이 아예 없었던 게 아니었고, 거기에 가능성이라는 말이 아주 작게라도 스며 있었다는 걸 알기에, 아프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데...

나에게 오는 건 결국 내 것이겠지.
그 말은 여러 번 마음속으로 되뇌어봤다. 그런데 그 말은 어쩌면, 이 마음을 억지로 끌어안지 않기 위해 만든 방어적인 믿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와의 인연이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내 것이면 돌아오겠지’라는 말로, 떠난 감정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낸 나 자신을 달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건넬 땐 늘 조심스럽고, 마음을 걷어들일 땐 늘 조용하다. 나는 그렇게 감정을 마무리하는 사람이고, 이번에도 그랬다. 그래도, 언젠가는. 진짜 나의 속도와 감정에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너무 늦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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