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3월 초에 헤어지고 난 뒤, 올해는 유난히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았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미리 짜놓은 운명의 시간표를 따라가듯,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소개팅 제안이 들어왔고, 7월 초에는 친구의 강한 추천으로 호기심 반으로 깔아본 어플을 통해서도 네 명 정도의 사람을 만났다. 여기에 지인을 통한 소개까지 합치면, 아마도 22명에서 24명쯤 되는 사람들이 내 앞에 앉았던 것 같다. 사주라는 것이 실제로 있다면, 올해 나에게는 ‘사람’이라는 키워드가 주어진 해였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로 시작했던 만남이었지만, 점차 내가 진지하게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 과정 자체가 나를 성찰하게 하는 경험이 되었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짧게 스쳐가는 대화 속에서, 혹은 두세 마디 말로 끝나버리는 짧은 만남 속에서조차, 나는 그 순간마다 나 자신을 거울처럼 비추어보았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하나씩 쌓여갈수록, 나는 자연스럽게 내 안의 기준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호감이나 외적인 매력이 아니라, 내 삶의 결을 크게 흔들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대화가 억지로 이어지지 않고, 내가 지내온 친구들과도 큰 어색함 없이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그 속에 사유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는 사람. 무엇보다도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동시에 계산적으로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신중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는 사람. 그렇게 정리하고 보니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이상형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내면의 안정성이었다.
그러던 중, 결국 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 닿았다. 8월 초에 스스로에게 ‘8월이나 9월쯤까지 스무 명 정도 만나보고, 그 뒤로는 소개팅을 그만두자’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8월에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이제 8월까지만 하자’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다시 그 끝 무렵에는 ‘이제는 지친다, 잠시 멈추고 싶다’라는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바로 그 즈음, 8월 29일, 용산에서 그 사람과 첫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다소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날 처음 만났을 때 문득 ‘아, 이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겠다’는 직관 같은 감정이 스쳤다. 내게는 처음 드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물론 그것이 단순히 그의 분위기나 이미지에 압도당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개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묘한 여운이 남았고, 결국 나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마치 내가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동안의 연애와 만남들을 겪어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분명 ‘설렘’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의 나는 그 감정을 단순한 설렘으로 축소하기보다는, 차분하면서도 선명한 감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내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조급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주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고, 다만 필요한 만큼만 꺼내놓았다. 나이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대화가 잘 통했고, 그의 눈빛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완전히 읽어낼 수 없었던 그 알 수 없음조차도 나를 묘하게 단단히 끌어당겼다. 그 모호함 속에는 불필요한 무례함도, 지나친 조급함도, 감정을 강요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이 사람을 남자친구로 두고 싶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타인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사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늘 많은 의심과 두려움의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두려움에 끌려다니지는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상대에게 나를 설명하려 애쓰기보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여주기로 했고, 그 과정이 더디고 늦더라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지인의 소개로는 수없이 이어지지 않았던 인연이, 아이러니하게도 어플을 통해 이어지고 연애로 발전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타이밍이라는 것은 결국 이렇게 찾아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내게는 멀리 있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더 조용하고 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아주 의미 있는 시작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다짐한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을 것. 무엇보다 내일을 성실하게 살아갈 것. 그리고 그 위에, 지금의 감정을 조용히 놓아두기로 한다. 그것이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도 않게, 기대는 조금 하되 기대에만 매달리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