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르쳐준 인간관계

가을

by 은서

가을이 오면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진다. 바쁘게 지나간 계절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마음 안에서 아직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을 조용히 바라보게 된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감정도, 한때 나를 들뜨게 했던 사람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다시금 차분히 정리하게 되는 계절이 바로 이 가을이다. 살아오면서 정말 많은 인연을 만났다. 처음에는 모두 괜찮아 보였다. 다정한 말투와 세련된 유머, 때로는 여유롭고 단단해 보이는 말투와 제스처까지, 어느 순간엔 나보다 한 발 앞서 있는 듯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기대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나면 결국 보이게 되는 것이 있었다. 진짜와 가짜는 결국 시간이 드러내는 것이고, 오래 함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심과,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와 닿지 않는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뒤늦게서야 알게 됐다.


처음에는 웃으며 넘기던 말이 어느 날 차가운 돌처럼 가슴에 남고, 조금의 다툼에도 조용히 등을 돌리는 사람을 보며, 나는 내가 믿었던 감정과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이해하는 척, 여유로운 척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척’이라는 가면은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고, 누군가는 작은 내 실수에 유난히 예민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필요할 때만 다가와 날 이용했다. 다름을 인정해주기보다는 너는 틀렸다고 단정 짓는 말투로, 나는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조금씩 작아지고,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게 되었다.


가짜 인연은 유난히 변명과 설명이 많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네가 오해한 거야", "나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어" 같은 말들이 반복될수록 마음은 더 멀어졌고,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방어하려는 말들이 앞섰다. 변명이 길어질수록 신뢰는 희미해졌고, 설명이 많아질수록 진심은 흐려졌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진짜 인연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고, 가짜 인연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마음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이 단순한 사실을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체감하게 되었다.


억지로 끌어안아야 하는 관계는 언젠가 나를 지치게 하고, 애써 이해하려 애쓴 사람은 결국 또 다른 상처를 남기고 떠났다. 반대로, 나와 잘 맞았던 사람들은 어땠나 돌아보면, 그들은 애써 다가오지 않았고,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으며, 내가 특별하지 않아도 조용히 내 곁에 있어주었다. 감정으로 휘두르거나 내 마음을 뒤흔들려 하지 않았고, 자기 삶을 묵묵히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나와 나란히 걷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작고 단순한 약속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괜찮아, 이 정도쯤이야”라고 무심하게 넘기지 않았다. 서로의 다름을 탓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부드럽게 인정해주었고, 때로는 오해가 생겨도 장황한 설명 대신 짧은 진심으로 마음을 풀어주었다.


“오해했구나, 미안해.”
“내가 서운하게 했구나.”


그 짧고 담백한 말 한마디가 길고 복잡한 설명보다 훨씬 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고, 내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해석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조용히 있는 그대로의 나로도 괜찮았다. 그런 관계는 빠르게 타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격렬하지 않았고, 드라마틱하지도 않았지만, 대신 조용하고 느리고 단단했다. 서로를 의심하거나 시험하지 않았고, 상대에게 과한 기대를 걸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서로의 리듬을 맞추며 천천히 신뢰가 쌓여갔다.


나는 이제야 그런 관계가 주는 평안함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늦게 배운 것이지만,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이제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와 급하게 가까워지려 하지 않고, 나를 이해해달라고 억지로 설득하지 않으며, 마음이 닿지 않는 사람에게 애써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인연은 서두른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진짜 인연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서로의 다름을 견디며 예의를 잃지 않고, 작은 약속들을 소중히 지켜가며 쌓여가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서운할 수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순간도 분명히 오지만, 그 다름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관계, 다르기 때문에 더 조심하고 더 예의 바르게 대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의 연결이 결국 오래가는 인연이 된다. 좋은 관계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앞으로는 빠르게 친해지기보다는 천천히 신뢰를 쌓고 싶고,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행동과 일관성을 보고 싶고, 나만 애쓰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같은 무게로 노력하는 관계를 선택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억지로 끌어안으려 하지 않고, 그저 천천히,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고 싶다. 가을이 되면 불필요한 것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결국 진짜 소중한 것들만 남게 된다. 사람도 그렇다. 나는 이제, 내 곁에 오래 남아줄 사람, 내 마음을 조용히 지켜줄 사람과 오래 함께 가고 싶다.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하게. 내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그러나 다시 열어보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무엇을 가져야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