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발'로 쓰는 거다

글 쓰는 그대여, 사람을 사랑하라

by 스페라

"엄마, 나 작가 됐어. 합격했다고"


이 말과 동시에 나는 아주 멋들어지게 행복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다니! 내가 방송작가가 됐다니!

정말 뛸 듯이 기뻤는데 막내작가로서의 생활은 작가라고 하기보다는 뭐랄까...

그냥 노동자, 심부름꾼 같은 느낌이었다.

PD가 촬영해 온 영상들을 빠르게 돌려보며 무슨 장면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기계처럼 타이핑을 쳤고, 메인작가들이 원하는 사람들을 섭외하기 위해

영업사원처럼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다.

선배들이 원고를 작성하는 동안 밤새 옆에 대기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전국 팔도에 유명하다는 맛집, 사람, 지역을 찾느라 인터넷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TV 속 프리랜서의 자유로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웬만한 직장인들보다 야근은 더 많았고, 밤샘은 루틴이었다.

선배들이 퇴근하기 전에는 퇴근의 '퇴'자도 꺼낼 수 없었다.

한 날은 장소 섭외를 하러 홍대에 갔다가 바로 퇴근할 줄 알았는데 메인 PD가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자기랑 밥을 먹잔다. 난 저녁 약속도 있었는데...

막내 작가는 팀의 일원이었고, 선배들의 시다바리나 다름없었다.

여느 회사의 신입사원처럼, 아니 그보다 더 빡셌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길과는 무진장 달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았다.





선배들의 타이핑 치는 소리, 원고가 쭉쭉 나오는 프린터 소리, 아이디어를 내느라 골머리가 터지는 소리,

방송날, 영상 엔딩크레디트에 나만 보는 내 이름 석자까지.

그 빡빡한 일정 속에 돌아가는 뭔지 모를 자유로움이 힘든데 끝없이 설렜다.

그렇게 막내작가를 거치고 입봉을 하고 메인작가로 내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

나는 막내가 하는 일이 글 쓰는 것과는 멀어 보이는데 왜 작가라는 말을 붙여주는지 알게 되었다.


방송작가는 '쓰는 것'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템을 선정해야 하고, 섭외를 해야 하고, 구성을 해서 촬영구성안을 써야 한다.

촬영을 따라가기도 하고, 촬영이 끝나고 나면 PD가 편집한 영상을 보고 대본을 써야 하고,

녹화에 참여해야 한다. 자막을 달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려면 막내 때부터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하고

막내가 없더라도 메인작가는 이 일을 혼자서 다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막내는 글 한자 쓰지 않아도 '작가'인 것이다.


폼 나게 '글 쓰는 것'만 할 줄 알았는데

시다바리처럼 힘들었던 그 많은 일들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방송작가로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일이었기에 설렜던 거 같다.



글은 앉아서 쓰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방송이든, 소설이든 마찬가지 일 것이다.

글은 '발'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혼자 쓰는 게 아니다.

내가 본 사람들, 내가 들은 이야기, 내 시선으로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어야

비로소 써지는 것... 그것이 글이다.


글쟁이로서

글 쓰는 것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이유는

이렇게 함께라는 걸 알기 때문에,

사람 사는 냄새를 가까이에서 맡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그대여,

사람을 사랑하라

진정 사랑할 때 우리는 '작가'가 되지 않겠는가

이전 06화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엄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