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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쓰 Eath May 20. 2021

기쁨을 거세당한 인간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나를 알아가기. #2

오전 10시, CS 미팅을 마치고 전화를 확인하니 대표님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하는데, 

"과장님" 하면서 운다. 어찌나 놀랐던지. 이게 뭔 일인가, 무슨 사고가 터졌나 싶어서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하니까

"우리 과제됐어요!" 하면서 더 운다. ㅋㅋㅋ

층간소음에 취약한 아파트라서 꽤 주의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소리를 막 질렀다. 

어머 세상에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스타트업 창업도약 패키지에 선정되었다.

서류 마감 일주일 전에 알게 되어서 밤늦게까지 대표님이랑 둘이서 머리 쥐어뜯으며 준비했다. 대표님 표현으로는 내가 '얼굴이 노래지면서' 썼던 보고서가 서류 통과하던 날, 그 날은 마음껏 기뻐했다. 그리고 바로 일주일 뒤에 발표가 있어서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발표 준비를 했다. 정신없이 준비하면서 대표님은 '우리 잘 될 거 같아요!'라고 했고 나는 내내 불안하고 불안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아서 좋았고, 예감이 더 좋지 않기를 바랐다. 왜냐면 내가 예감이 좋으면 다 망했으니까. 내가 입 밖으로 '아 불안하다'라고 뱉을 때마다 대표님과 직원들은 touch wood*를 시켰고 나는 테이블을 오지게 두드렸다.


내 기쁨은 생존기간이 찰나에 불과하다.

단톡은 환희로 가득했고, 우리 팀원들은 웃거나 울었다. 동료들이 기뻐하니 나도 꽤 기쁘긴 했는데, 그들이 내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기쁨은 이내 식어버렸다. 언제부턴가 알게 된 건데, 나는 기쁨을 잘 느끼지 못한다. 별 거 아닌 일에서는 기쁨을 잘 느끼는데 (동네 카페 사장님이 무스케이크 숨은 고수더라 같은), 정말 중요한 성취 앞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이 성취의 기쁨을 압도해버린다. 이번 과제로 우리는 1억 후반대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데스벨리에 접어든 스타트업으로서 지금의 시기에 너무도 '가뭄에 단비' 같은 지원금이다.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계획한 일들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내 뇌를 잡아먹은 감정은 'ㅇㅇ이는 혼자서 연봉으로 저 돈을 받는데. 나는 회사 단위로 간신히 저거 받고 기뻐하네? 진짜 한심하다.'였다. 오후 2시쯤, 아는 동생이 카톡으로 수익률 자랑을 했는데 1억 5천을 때려 박고 하루 만에 10%의 수익률로 천오백을 벌었다. 내 성취의 기쁨은 더욱 희석되었다. 지금 시간이 오후 4시, 좋은 소식을 들은 지 채 6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긍정적인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스타트업이기에 발견할 수 있는 나의 능력

이 과제가 나한테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건, 사실상 혼자서는 처음 써보는 과제였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하다 보면 정부 과제를 많이들 쓰게 되고, 도가 튼다고 하는데, 나는 학교에 있을 때 이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한 데이터를 정리해서 제공하는 정도만 했고, 내가 주도적으로 써본 적은 없다. 졸업하고 우연히 다른 과, 다른 연구실 출신의 박사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박사는 과제를 잘 써야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너무 부끄러웠다. 기본 중의 기본인 과제 한 번 써본 적 없는 박사라는 게 몹시 수치스러웠고, 자격지심이 하나 더해졌다. 바로 옆에 과제 귀신이 하나 있었거든. 그 친구의 시야에는 내가 아예 없었는데도 나는 또 혼자 쪽팔려했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니 정부지원과제를 써야 될 일이 자꾸 생긴다. '나는 이런 거 못해'라는 마음을 누르고 모두를 위해 써야 하니까 썼다. '내가 써봐야 안될걸'이라는 마음이 목구멍에서 오르내리는데 삼켜가며 계속 썼다. 나 혼자만의 일이었으면 안 썼을 거다. 나는 써봐야 서류에서 떨어질 거니까. (진짜로, 이런 마음 때문에 나는 대기업 지원서류를 써놓고 하나도 낸 적이 없다.) 근데 서류가 통과되었고, 내가 구성한 PPT와 대본으로 과제에 선정되었다. '하니까 되기도 하는구나.' 딱 여기까지 왔다 지금. 앞으로 펀드 지원을 더 하다 보면 '내가 할 줄 아는 일'에 과제 쓰기도 들어가게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본능적으로 내 성취를 보잘것없게 만드는 상황들을 찾아내서 내 앞으로 또 이만큼 줄 세우고 내가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지난번 글에서는 돈에 대한 내 트라우마의 근본을 찾았는데, 이 고약한 습성의 원인은 여전히 모르겠다. 이렇게 글로 적어도 정리가 안 되네. 아직 때가 아닌가 보다. 언젠가는 기쁨을 오롯이 느낄 수 있게 될 날도 오겠지. 왜냐면, 난 원래 안 되는 줄 알았던 일이 됐잖아. '나도 기쁨을 느낄 자격이 있는 인간'이라고 내가 날 인정해주는 날도 오겠지. 당장 지금은 또 우울해졌지만, 조바심 내지 말자.



*touch wood: 영어권에서 부정을 타지 않도록 빌기 위해 하는 주술적인 행동인데, 원래는 자랑 같은 말을 한 뒤에 신의 질투를 사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한다. 나는 찌질한 말을 자주 하니까 사실 내가 할 필요는 없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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