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부여를 해본다
100이라는 숫자의 무게
백이라는 숫자는 묘한 힘을 가졌다. 그것은 단순한 수의 증가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가 완성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상징적인 문지방이다. 마침내 내 브런치에도 '100'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백 번째 글을 발행했다.
첫 글을 쓸 때의 설렘과 두려움이 아직 생생한데, 어느새 백 번의 발행 버튼을 눌렀다.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숫자일지 몰라도, 백 번의 밤과 낮, 백 번의 망설임과 퇴고, 그리고 백 번의 용기가 담긴 숫자다. 이 정도면 스스로 '꾸준함'이라는 훈장 하나쯤은 줘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백 번째 글을 발행한 뒤 축포를 터뜨리는 대신, 나는 통계 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들쭉날쭉한 그래프, 어떤 글에는 폭발적인 반응이, 어떤 글에는 차가운 침묵이 흐른다. 이 극명한 '반응의 온도 차이'. 이것이 지금의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다.
100이라는 숫자가 가져다준 성취감은 잠시, '나는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차갑게 고개를 든다.
재미와 도움, 그 사이의 나
"재미있거나, 도움이 되지 않아서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질문은 요즘 콘텐츠의 숙명과도 같다. 독자들은 명확한 것을 원한다. 배꼽 빠지는 '재미'이거나,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도움'.
돌이켜보면,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글들은 대체로 그 둘 중 하나에 속했다. '마케팅 작가' 시절의 명확한 분석 글이나, '여행 작가' 시절의 화려한 풍경과 구체적인 팁을 담은 글들. 사람들은 그런 글들에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의 필요와 내 글의 목적이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의 '이것저것'들이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일상에서 느낀 미묘한 권태, 마케팅 전략과는 아무 상관없는 새벽녘의 철학적 고찰, 혹은 그저 스쳐 지나간 풍경에 대한 단상. 이런 글들은 '재미'와 '도움'이라는 척도 사이, 그 어디쯤 애매한 곳에 존재했다. 그리고 이런 글일수록 '나'와 가장 가까운 글이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거나, 아예 없거나, 혹은 예상치 못한 소수만이 공감할 뿐이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이 온도 차이는 나를 지치게 했다. 독자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수백 번 다짐했지만, 그 '차가운 온도'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마도 내가 나를 잘 표현하지 못했나 보다"
100편의 글을 썼다는 것은, 100번의 '나'를 세상에 내보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100명의 '나'가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일관된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제는 날카로운 전문가였다가, 오늘은 감상에 젖은 여행자가 되고, 내일은 길 잃은 철학자가 되는 사람. 독자들은 이 변덕스러운 작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가 나를 잘 표현하지 못했나 보다."
이것은 기술적인 글쓰기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문제다. 생각이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의 기질이, 나의 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버린 것이다. 나는 100개의 서랍을 가진 사람이었고, 매번 다른 서랍을 열어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독자들은 그중 자신이 필요로 하는 서랍(재미 혹은 도움)이 열렸을 때만 반응했을 뿐이다. 내가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서랍 안에 담긴 물건들이 아니라, 그 수많은 서랍을 가진 '나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나를 표현하는 데 실패한 걸까? 100편의 글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실패한 100번의 시도에 불과했던 걸까? 차가운 온도의 글들은, '이건 우리가 원하던 네 모습이 아니야'라는 무언의 거절처럼 느껴졌다.
100번의 표현, 100번의 탐색
백 번째 글 앞에서, 나는 이 '온도 차이'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발견'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100편의 글은 '나를 표현하는' 과정인 동시에,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독자들이 반응하는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나 스스로가 가장 불타오르는지를 100번에 걸쳐 실험해온 것이다.
'나를 잘 표현하지 못했다'는 자책은, '나는 이토록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은, 다채로운 사람이었다'는 고백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차가운 반응을 얻었던 글들은 실패작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가장 솔직한, 어쩌면 아직은 설익은 '본심'의 기록이다. 대중적인 재미나 유용성이라는 틀에 욱여넣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생각들이다. 그 글들에 반응이 없었다는 것은, 그저 '아직' 그 글을 필요로 하는 독자를 만나지 못했거나, 혹은 그 표현 방식이 조금 더 다듬어질 필요가 있었다는 신호일 뿐이다.
'마케팅'과 '여행'이라는 분명한 이름표를 달았을 때 나는 편안했다. 하지만 '이것저것'을 쓰는 지금, 나는 불안하지만 동시에 가장 나답다. 100편의 글은 그 불안 속에서 나다움을 찾아가려는 치열한 분투의 기록이다.
백한 번째의 문 앞에서
이제 나는 백한 번째 글을 쓰고있다. 100이라는 숫자를 통과하며, 나는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재미'만 주거나 '도움'만 주는 작가로 남고 싶지 않다는 것. 나는 나의 '이것저것'을, 나의 복잡다단함을, 나의 온도 차이를 사랑하는 작가로 남고 싶다는 것이다.
반응의 온도 차이는 여전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온도를 조금 더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뜨거운 반응은 독자들과 나의 교집합이 성공적으로 만났다는 기쁨의 신호로, 차가운 반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이야기를 해야 했다'는 나의 고집과 진심의 증거로 삼을 것이다.
100편의 글은 나를 표현하는 연습이었다. 이제 백한 번째 글부터는, 그렇게 찾아낸 '나'를 어떻게 하면 독자들의 마음에 조금 더 가깝게 가닿게 할 수 있을지, '표현'을 넘어 '연결'을 고민할 차례다. 나의 다채로움이 독자들에게 혼란이 아니라, '이 작가에게는 또 어떤 서랍이 있을까?'하는 설렘과 기대로 다가갈 수 있도록 말이다.
백 번째 글을 넘어서며, 나는 비로소 '나를 잘 표현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그것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하나의 목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목소리를 끌어안고 그 전체로 '나'임을 증명해내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