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너무 많다

15년 차 마케터, 혹은 AI를 입은 원맨아미의 고백

by 팀포라

나는 내가 너무 많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한 성격 탓일까, 아니면 세상이 내게 너무 많은 가면을 요구하는 탓일까.

나는 15년 차 마케터다. 강산이 한 번 반이나 변할 시간이 흘렀고, 명함에는 꽤 무거운 직함들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 이 연차가 되면 뒷짐 지고 지시를 내리는 '관리'의 영역이 편해질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필드가 좋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실무를 뛰는 게 더 내 옷처럼 느껴진다. 흙먼지 날리는 전장이 체질인 탓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전장이 너무 넓어졌다. 단순히 넓어진 정도가 아니라, 시공간이 뒤틀린 느낌이다. 나

는 분명 마케터로 입사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개발팀 한가운데 앉아 있다. "저 개발자 아닌데요?"라고 항변해 봐도 소용없다. IT 부서 업무까지 내게 넘어온다. 회사를 여러 번 옮겨 다녔지만, 옮길 때마다 일복이 터지는 건 내 팔자인가 싶다. 하루 동안 처리하는 일들을 나열해 보면, 이건 한 사람의 업무라기보다 차라리 중소기업 하나의 부서 전체 업무 리스트에 가깝다.


약학대학 인턴십 프로그램을 총괄하며 60명의 예비 약사들을 관리하고 교육 과정을 짠다. 그러다 돌아서면 의약품 전문몰 고도화 기획을 하고, 또 엑셀을 켜서 경쟁사 시장 조사를 한다. 약사님들을 위한 PB 상품을 기획하다가, 갑자기 신규 입사자 케어를 위해 인사팀 흉내를 낸다.

CRM 자동화 툴을 만지작거리다가 광고 성과를 체크하고, 브랜드 이벤트 사이트를 직접 제작하고 관리한다. 매출 압박에 시달리며 상품 소싱을 하러 전화를 돌리고, 제휴 업체를 발굴하고, 신규 프로젝트 론칭 기획안을 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해내고 있다. 바로 내 옆에 든든하고 비싼(?) 파트너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달 100만 원 가까운 돈을 AI 구독료로 지출한다. 클로드, 오픈코드, 제미나이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AI 모델들을 멀티 병렬 에이전트로 활용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장담컨대 나는 벌써 사직서를 던졌거나, 과로로 쓰러졌을 것이다. AI는 내 손과 발이 되어 나에게 웹사이트를 만들어주고, 꽉 막힌 기획안의 물꼬를 트여준다. 덕분에 나는 혼자서도 군대 하나만큼의 화력을 뿜어내는 '원맨아미'가 되었다.


각 부서 동료들도 정말 열심히 도와준다. 협조 요청을 보내면 다들 발 벗고 나서준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업무는 폭탄처럼 쏟아지고, 나는 그 폭심지 한가운데서 AI라는 방패와 칼을 들고 미친 듯이 칼춤을 추고 있는 기분이다. 효율은 극대화되었고, 성과는 나오고 있다. 15년의 경험치에 AI의 속도가 붙었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문득, 모니터 앞에서 멍하니 커서가 깜빡이는 걸 바라볼 때가 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인턴십 총괄 매니저인가, 기획자인가, 개발 보조인가, MD인가, 아니면 그저 AI에게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오퍼레이터인가. 너무 많은 일을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아닌 AI의 힘을 빌려 성과를 내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일까. 분명 내 손끝에서 결과물이 만들어지는데, 가끔은 내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이 되어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옭아매는 것은 아닐까.

"와, 팀장님은 못 하는 게 없으시네요."라는 칭찬이 예전처럼 달갑지만은 않다. 그 말이 "그럼 이것도 해주세요."라는 청구서처럼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수십 개의 브라우저 탭을 띄워놓고, 수많은 '나'들 사이를 오간다. 약대생들의 멘토였다가, 데이터를 분석하는 냉철한 전략가였다가, 크리에이티브를 짜내는 기획자가 된다. 나는 내가 너무 많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하나도 없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순간에도, 나는 습관처럼 AI에게 묻는다.

"다음 프로젝트 기획안, 초안 좀 잡아줘."


그래도 생존해야 하니까.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기에 나는 성실하게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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