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만 원을 아끼고 인재를 잃는 법

전문가의 '도구'를 심문하는 조직의 결말

by 팀 포라

실력 있는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지만, 최고의 목수는 스스로 최고의 연장을 구비한다. 마케팅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매달 100만 원이 넘는 사비를 AI 툴에 투자해 왔다. 조직의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이 '개인적 투자'는 오로지 압도적인 결과물과 업무 효율을 위한 전문가로서의 고집이었다.

하지만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팀 전체의 효율을 위해 기안한 월 36만 원의 '제미나이 울트라' 도입건을 마주하며 나는 사직을 결심했다. 단순히 기안이 반려되어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조직의 비합리성과 전문성에 대한 모독 때문이다.


1. 전문가의 언어를 심문하는 '관리'의 오만

마케팅 전문가가 업무 효율화를 위해 제안한 도구를 두고, 지원 부서의 실무자와 한 시간가량 '소명'의 시간을 가졌다. 지원 부서 담당자는 "본인이 경영학 전공자라 마케팅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안지의 항목 하나하나를 죄인 심문하듯 몰아세웠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지원 부서의 역할은 실무 부서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돕는 'Enabler'이지, 본인의 지식 범위로 실무의 전문성을 재단하는 'Gatekeeper'가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면 가이드를 요청하는 것이 상식이다. 자신의 무지를 근거로 전문가의 커리어와 언어를 폄하하는 조직에서, 실무자의 자존감은 설 자리가 없다.


2. 기여의 역설: 지원 부서의 일을 대신하는 실무자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은 현재 마케팅 본업 외에도 경영지원팀의 고유 업무인 채용 행정과 일정 조율 업무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타 부서의 업무 부하를 기꺼이 덜어주고 있는 실무자에게, 정작 본연의 지원 업무(소프트웨어 도입 등)에서는 고압적인 태도와 형평성 없는 잣대를 들이대는 조직 구조는 모순 그 자체다. 어떤 이는 대면 소명 없이 통과되고, 어떤 이는 심문을 당하는 일관성 없는 행정 절차는 조직 내 불신을 조장하는 비효율의 극치다.


3. 최악의 ROI: 36만 원과 퇴사의 상관관계

기업은 비용에 민감해야 한다. 하지만 그 '비용'에는 눈에 보이는 섭스크립션 금액뿐만 아니라, 숙련된 인재의 시간 가치와 그가 창출할 기회비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매달 100만 원 이상의 사비를 들여 스스로를 갈고닦던 인재가, 조직을 위해 요청한 36만 원의 투자를 부정당했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소액의 비용 집행에도 차별적인 잣대를 대는 것이 조직의 기조라면, 퇴사가 그들이 추구하는 비용 절감 목표를 가장 확실하게 달성하는 길이다.


맺으며: 전문가의 자존감은 성과와 직결된다

조직이 월 36만 원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전문가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비본질적인 행정과 감정 노동에 에너지를 쏟기에 우리의 커리어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오늘 36만 원을 아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이 잃은 것은 한 명의 마케터가 아닌, 조직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던 혁신의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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