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도구'를 심문하는 조직의 결말
실력 있는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지만, 최고의 목수는 스스로 최고의 연장을 구비한다. 마케팅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매달 100만 원이 넘는 사비를 AI 툴에 투자해 왔다. 조직의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이 '개인적 투자'는 오로지 압도적인 결과물과 업무 효율을 위한 전문가로서의 고집이었다.
하지만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팀 전체의 효율을 위해 기안한 월 36만 원의 '제미나이 울트라' 도입건을 마주하며 나는 사직을 결심했다. 단순히 기안이 반려되어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조직의 비합리성과 전문성에 대한 모독 때문이다.
마케팅 전문가가 업무 효율화를 위해 제안한 도구를 두고, 지원 부서의 실무자와 한 시간가량 '소명'의 시간을 가졌다. 지원 부서 담당자는 "본인이 경영학 전공자라 마케팅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안지의 항목 하나하나를 죄인 심문하듯 몰아세웠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지원 부서의 역할은 실무 부서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돕는 'Enabler'이지, 본인의 지식 범위로 실무의 전문성을 재단하는 'Gatekeeper'가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면 가이드를 요청하는 것이 상식이다. 자신의 무지를 근거로 전문가의 커리어와 언어를 폄하하는 조직에서, 실무자의 자존감은 설 자리가 없다.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은 현재 마케팅 본업 외에도 경영지원팀의 고유 업무인 채용 행정과 일정 조율 업무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타 부서의 업무 부하를 기꺼이 덜어주고 있는 실무자에게, 정작 본연의 지원 업무(소프트웨어 도입 등)에서는 고압적인 태도와 형평성 없는 잣대를 들이대는 조직 구조는 모순 그 자체다. 어떤 이는 대면 소명 없이 통과되고, 어떤 이는 심문을 당하는 일관성 없는 행정 절차는 조직 내 불신을 조장하는 비효율의 극치다.
기업은 비용에 민감해야 한다. 하지만 그 '비용'에는 눈에 보이는 섭스크립션 금액뿐만 아니라, 숙련된 인재의 시간 가치와 그가 창출할 기회비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매달 100만 원 이상의 사비를 들여 스스로를 갈고닦던 인재가, 조직을 위해 요청한 36만 원의 투자를 부정당했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소액의 비용 집행에도 차별적인 잣대를 대는 것이 조직의 기조라면, 퇴사가 그들이 추구하는 비용 절감 목표를 가장 확실하게 달성하는 길이다.
조직이 월 36만 원의 가치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전문가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비본질적인 행정과 감정 노동에 에너지를 쏟기에 우리의 커리어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오늘 36만 원을 아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이 잃은 것은 한 명의 마케터가 아닌, 조직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던 혁신의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