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기계> - 하이너 뮐러
하이너 뮐러가 브레히트 연극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극은 연극일 뿐이며, 관객은 연극에 동화되어 무비판적으로 몰입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연극을 통하여 끊임없이 사고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은 관객에게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생소한’ 장면을 제시해야 한다.
뮐러의 <햄릿기계>는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종래의 희곡과는 다른 형식을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정통 희곡과 유사한 점이라면 5개의 장이 5막을 대신하며 등장인물이 무대에서 연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는 유사점을 찾기가 쉽지 않으며 연극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조차 어렵다. 정신을 다잡고 이야기의 끈을 잡아도 군데군데 갈라지고 터져버려 끝내 망연자실의 한가운데 서 있게 된다.
친족 살해와 근친혼, 식인행위, 근친상간 등의 장면으로 시작되는 1장은 ‘가족 앨범’이라는 제목이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아니다. 햄릿이었던 나는 상상조차 힘든 잔혹함을 펼쳐 보이면서 아버지를 철저하게 죽이고 오필리어의 심장을 먹고자 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역사의 고리를 끊어낸다.
2장 ‘여자의 유럽’에서 오필리아[합창/햄릿]는 수직적 질서 즉, 남성중심사회를 상징하는 “시계”를 가슴에서 꺼내고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도구를 불태우고 “거대한 방”에서 나와 거리로 나간다. 오필리어[합창/햄릿]는 역사 속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을 상징하며 동시에 썩어빠진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햄릿이기도 하다.
3장 ‘스케르초’에서는 속도가 빨라진다. 햄릿을 제외한 인물들은 모든 죽은 상태로 등장한다. 햄릿은 죽은 자들의 공연을 보며 죽음을 동경한다.
4장 ‘부다의 페스트(PEST IN BUDA) 그린란드를 둘러싼 싸움’에서 햄릿은 더 이상 햄릿이 아니다. 그는 단지 햄릿의 연기자가 되었다가 기계가 된다. “여자를 남자를 아이를 동물을 사랑하지 않겠다. 나는 이제 죽이지 않겠다. 나는 이제 죽이지 않겠다.”를 외치며 “모든 관계를 전복하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
마지막 5장 ‘섬뜩한 갑옷을 입고 / 몇 세기를 / 미칠 듯 기다리면서’에서 오필리아는 복수의 상징인 엘렉트라로 바뀐다. “희생자의 이름으로” 자신이 낳은 “정복의 행복”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죽인다. “도살자의 칼을 가지고” “침실을 가로질러” 가자 남자들은 퇴장하고 미라의 모습을 한 오필리어 만이 무대에 남는다.
<햄릿 기계>에서 햄릿은 가족을 해체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끊은 뒤 오필리어 또는 여자가 되어 “갑옷”을 입고 사회의 변혁을 기다린다. 모든 죽은 여자들 또는 억압받은 자들의 죽음, 미라가 된 오필리어는 죽음으로 역사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역사에 대한 희망을 보여 준다.
참고도서
하이너 밀러(정민영 옮김): 뮐러 희곡선, 지만지드라마,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