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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나무 Apr 12. 2023

출가외인과 현모양처

강릉 시내 곳곳에 신사임당의 숨결이 살아 있다. 신사임당을 기리는 유적지는 언제나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오만 원권 지폐의 힘인가.


이 년 만에 본 강릉은 여전히 신사임당과 함께였다. 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오죽헌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구처럼 보이는 젊은 여성들,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성들의 무리, 어린아이들과 함께인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오죽헌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2009년 6월에 오만 원권 지폐가 발행되었다. 당시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이 새로운 지폐는 의의가 컸다. 다른 선진 경제 국가들처럼 우리도 커진 경제규모에 걸맞게 고액권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새로 만들어질 지폐에는 성 평등에 대한 사회적 추세에 따라 여성 인물로 결정되었고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을 선택했다. 그 결정에 한국여성 단체연합 등은 “현대 여성이 살아가는 데에 의미를 주는 여성이 뽑혀야 여성계 대표로서 의미가 있다”(2007년 11월 5일 연합뉴스 참고)며 반대를 하기도 했다. 유관순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여론에 대답도 없이 한국은행은 신사임당을 선정했다. 초상화를 누가 그렸으며, 지폐 앞면과 뒷면의 그림에 대한 문제점 등 여러 가지 논의가 분분했다. 정작 나는 지폐의 인물이 누가 되든 관심이 없었지만 세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의 입장에서 여성단체들의 주장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신사임당이 학문과 예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여성이긴 하지만 ‘율곡 이이의 어머니’나 ‘현모양처’의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는 점 이 문제였다. 그러나 그는 남편의 영향보다는 자주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생을 영위한 듯 보인다.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버지 신명화는 당시 사대부들의 결혼 방식인 유교식 중국 혼례의 풍습을 거부하고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 방식을 택했다. 유교식 결혼은 흔히 ‘시집간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남자 중심의 결혼 풍속이다. 반대로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은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처럼 남자가 일정 기간 여자의 집에서 사는 방식이다.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한 조선시대의 결혼은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맞춰진, 남자의 권리로만 존재했다. 아버지 신명화는 딸의 능력이 남편 뒤로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형편이 어려운 양반 가문의 남자를 골랐고 신사임당은 시어머니가 죽어 살림을 돌볼 수 없게 되기까지 19 년을 친정에서 살았다.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남편을 살피는 등 현모양처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았다. 5백 년도 더 이전에 있었던 이 야기이다.


10년 전인가… 이력서를 쓸 일이 있었다. 이전에 썼던 이력서에 경력 한 줄을 추가해서 가져갔다. 담당자는 대뜸 자신과 내가 같은 본적이라며 아주 반가워했다. ‘영해’가 본적이긴 하지만 가 본 적도 없고 그저 아버지의 본적이라 썼다고 하니, ‘결혼하셨잖아요? 그러면 남편의 본적을 써야 돼요’한다.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인지해 본 적은 없었다. 결혼하면 여자의 본적지가 바뀐다는 것을. ‘시집간다’는 말이 실체로 느껴졌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결혼과 동시에 자신이 속해있던 집단에서의 권리가 소멸된다. 그렇다고 남편이 속한 집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아들의 출산과 현모양처의 역할을 강요받는다.


이미 두 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붙은 수식어는 ‘어서 자식을 낳아야지’였다. 말이 빨랐던 큰 딸은 어르신들의 말에 ‘내가 나중에 아들 낳을 거예요’라는 말을 암팡지게 쏘아대곤 했다. 웃고 넘기는 내 태도에서 딸이 본 무언가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시아버지의 독촉은 심해졌다. 매주 팔에 안는 손녀의 무게는 자식이라는 저울에 달 수가 없었던 걸까…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나 보다. 태아의 성별 확인이 금지되었던 당시 서점에는 아들과 딸을 ‘골라서’ 낳는 방법에 관한 책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자극적이거나 권유하는 듯한 다양한 제목을 가진 책들의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았고 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사주풀이였다. 확률 게임이라면 그게 좀 더 과학적이라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달로부터 아홉 달을 거꾸로 셈하여 임신을 하고, 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사주풀이에 의지하여 21세기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그날 시아버지는 병원 로비에서 ‘세상을 다 얻었다’고 크게 소리쳤다. 병원 직원 모두에게 점심을 샀다는 말을 듣고 서럽게 울었다. 둘째 아이를 낳은 직후 ‘또 딸을 낳았니?’라던 시아버지의 말이 그날 더 세게 나를 찔렀고, 우는 곁에서 ‘엄마 너무 아파?’라며 더 서럽게 우는 다섯 살 난 둘째 딸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아들의 출산으로 집안은 더욱 화목해졌다. 그러나 그 일로 남편의 씨족 공동체 내에서 내 자리가 공고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의당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의 목록 중 하나였다.


몇 번의 법이 개정되고 1990년에 모든 자녀가 동일하게 상속을 받게 되면서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무색해졌다. 친정아버지의 사망신고 후에 남동생은 순진한 얼굴로 내게 재산 포기 각서를 내밀었다. 엄마와 상의한 결과라 했다. 일언반구도 없이 사인을 해주었다. 나는 나의 씨족 공동체에서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예고 없는 각서는 나를 완전하게 출가외인으로 만들었지만 나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났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의 운명은 이제 전적으로 남편의 씨족 공동체로 넘어갔다. 아들의 출산이 나와 그들을 혈연으로 연결해 주었지만 여전히 나의 권리는 없어 보인다. ‘현모양처’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해야 한다.


5백 년도 더 이전에 신명화는 딸을 출가외인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게 했다. 그러나 딸만 다섯이고 아들(또는 자식)이 없었던,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시대에 한 씨족의 대표인 그의 의도에 의문이 생긴다. 신사임당은 그의 총명한 딸일 뿐이었는지. 그가 가진 부와 명예를 이용하여 딸을 아들로 키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결혼 후 이십 년 가까운 친정 생활은 신명화가 손자로 하여금 가문의 명예를 잇도록 한 게 아닌가 궁금하다. 빼어난 예술가로 알려진 신사임당의 그림의 소재는 대개가 집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물과 생물들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이 예술가의 바람이지 않을까. <진경산수화>나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율곡 이이의 자랑스러운 어머니라는 찬사로 장식된 오죽헌을 보러 온 관광객들이 오백 년을 이어 신사임당의 발을 잡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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