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을 열고 앉았다.
요즘은 신발을 세지는 않는다. 그저 시선을 신발 쪽으로 두고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한다. 정리를 다시 해야 하는데…. 새로 산 운동화와 구두를 넣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 신발들을 이리저리 옮겨 본다. ‘엄마 신 또 샀어요? 지난주에 산 건가? 아니네. 또 사셨네.’ 딸애의 물음에 나는 별 대답을 않고 딸애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는다. 신발장을 정리하지 못한 탓에 지난주에 새로 사 온 운동화를 현관 입구 한 켠에 놓아두었는데 그걸 딸애가 본 모양이었다.
현관의 양쪽 벽면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신발장이다. 얼마 전 이사를 하여 신발장이 바뀌었다. 아홉 개의 칸이 열 개가 되면서 신발 정리를 새로 해야 했다. 차일피일 미룬 것이 벌써 다섯 달이다.
지난주에 집 근처 백화점에서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겨울 코트를 사러 오는 김에 만나서 점심이나 먹자고 했다. 그럴까. 이번 겨울 유행 색감과 디자인을 열심히 설명하는 가게 직원의 말에 따라 친구는 진열장에 걸려 있는 옷을 다 입어보는 것 같았다. 코트 디자인에도 친구의 패션쇼에도 관심 없이 앉아 있던 내 눈에 운동화가 들어왔다. 요즘은 옷 가게에서 옷과 어울리는 신발과 가방, 장신구들을 함께 판매한다. 여러 종류의 가죽과 새틴 옷감까지,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이는 재료 들로 만들어진 운동화는 그곳의 어떤 옷보다 시선을 끌었다.
일 년 만이다. 막내가 대학에 입학을 한 후 한동안은 신발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이사도 하고 삼십 년을 미루었던 프랑스어 공부를 드디어 시작을 한 덕이다. 타임운동화는 지난 일 년간 잠자고 있던 나의 눈을 뜨게 했다. 아침 일찍 지난주 겨울 코트를 산 친구로부터 붉은색 코트가 계속 눈에 어른거린다며 옷을 교환하러 간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약속시간보다 일찍 백화점에 도착했다. 3층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신 후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는 르 베이지로 앵클부츠를 사러 갔다. 지난주 왔을 때 본 신발이다. 발목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길이와 적당한 높이의 굽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하는 바지 기장과 잘 어울린다. 계산을 마치고 옷가게 타임으로 갔다. 다행히 패션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관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오른쪽 신발장의 신발은 모두 나의 신발이다. 백여 켤레의 신발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신발의 상태를 확인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AS를 맡겨 신발이 언제나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딸애와 발 사이즈가 달라서 내가 모르는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새로 산 운동화는 눈높이에서 두 번째 아래 칸에, 앵클부츠는 맨 아래에서 세 번째 칸에 넣는다.
나는 정리된 신발에서 지극한 기쁨을 느낀다. 신발 모으기는 나의 은밀하고도 기이한 취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신고 있는 신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면 신발 페티시는 아닌 게 확실하다. 신발은 집 안에서 ‘집 밖으로’ 나갈 때 필요하다. 길을 잘 걸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신발이 필요하다. 신발은 발이 제 능력을 발휘하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
중국에서 여성에게 전족을 행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10세기경부터 행해진 전족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고 한다. 전족을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두 가지로 수렴할 수 있다. 하나는 작은 발로 큰 몸을 지탱하며 종종 걷는 걸음이 엉덩이와 허벅지, 음부의 근육을 강화시켜 남성에게 성적 쾌감을 극대화시킨다는 이유로, 두 번째는 여성의 이동을 제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작은 크기의 신발을 미리 정해놓고 여성의 발을 그 크기에 고정시킨다. 서너 살이 되면 닭을 잡아 뜨겁게 한 닭의 뱃속에 여자아이의 발을 넣어 부드럽게 만든 뒤 발가락 뼈를 꺾어서 꽁꽁 묶어 놓는다. 발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보행이 불편한 전족은 여성의 세계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집이 상징하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쉽지 않은 여성들은 쉽게 규범에 순응하게 된다.
시대와 장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신발에 대한 옛이야기들은 비슷한 결론으로 끝이 난다. 신분상승의 도구가 되거나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법의 힘을 발휘한다. 신발의 주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면서 그간의 고난을 보상한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결론은 규범과 체제에 순응하는 약속과 희생정신을 담보로 한다. 반대의 경우는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카렌처럼 빨간 구두를 신고 끝없이 춤을 추는 벌을 받는다. 카렌은 공주의 신발과 똑같은 빨간색 가죽 구두에 매혹된다. 가난한 카렌에게 이 빨간색 가죽 구두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신발이다. 빨간 구두에 대한 욕망을 이기지 못한 카렌은 사회적 규범의 경계를 넘었기 때문에 행복한 결말이라는 마법의 힘을 갖지 못한다. 쉼 없이 춤을 추어야 하는 벌을 받게 된다. 자신의 발목을 잘라내는 것에 동의한 후에 야 비로소 카렌은 춤을 멈출 수 있게 된다.
독재자로 21년 간 장기 집권했던 필리핀의 전 대통령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민주화 운동으로 축출되었던 당시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은 영부인 이멜다의 구두였다. 남편의 집권 기간 동안 이멜다가 사 모아 놓은 구두 3000켤레(나중에 1060켤레로 밝혀졌다)가 매일 전 세계 브라운관을 달구었다. 이후 망명 생활 중에 남편이 사망하고 필리핀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이멜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대통령 선거 출마였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4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필리핀의 정치적인 상황은 차치하고 나는 이멜다의 구두에 대한 집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발을 정리하는 내 등 뒤에서 TV 광고가 흐른다. 잉꼬부부라고 알려진 연예인 부부가 웃으며 내게 말한다.
‘양우 건설, 내 안愛(내 아내/내 안에).’ 사랑하는 아내는 집이 되어 영원히 콘크리트 바닥에 붙어 있다. 그녀 남편의 ‘뱃속’에서 발가락이 꺾여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내 안애’ 그녀는 몇 켤레의 신발을 정리해 놓았을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발들을 보면서 나는 상상한다. 이 신발들이 내게 마법의 힘을 발휘할 것인지 쉼 없이 춤을 추게 만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