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절벽을 오른다. 생각보다 잘 올라간다. 열심히 올라간다. 힘들다는 생각 보단 곧 정상에 오를 것만 같다. 1킬로미터 2킬로미터, 몇 달 몇 년을 계속 오르다 보니 끝이 없는 절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드니 아직도 끝이 안 보인다. 내려다보니 지나온 길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무한히 긴 절벽에서 다시 내려가지도 더 올라갈 수도 무엇을 선택할지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이 지점에 서있는 게 지금, 최선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만 왜 삶은 나아지지 않을까?’ 공허한 발걸음이 동대문 창신동으로 이끌었다. 22년 전 서울살이를 시작했던 달동네. 해가 몇 번씩 바뀔 때면 잊고 지내던 이곳을 찾아본다. 뿌리를 찾아가는 심경일까? 서울의 시작점이 된 이곳에서 어린 날의 나를 되새기고 싶은 마음. 문득 찾아오면 변한 것과 머물러 있는 것이 묘한 긴장감과 안락감을 동시에 준다.
외국인이 많아졌다. 외국어 간판을 단 식료품가게도. 시간의 흐름이 사람들을 보며 체감된다. 노점들 사이로 메리어트 호텔이 동대문 뒤로 보인다. 창신 시장길은 좁고 노후화된 골목길 그대로를 유지한 채. 골목길에 들어서니 내 나이보다 오래된 족발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아주 가끔 벼르고 벼르다 몇 달에 한 번씩 먹었다. 그것도 소주 값이 아까워 포장으로만 사 먹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만물상도 보인다. 저곳에서 서랍, 책꽂이를 샀었지.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가게 안에서 다른 사람과 술을 마시고 있다. 시장 더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분식집이 보인다. 그때도 할머니였던 사장님은 몸이 더 쪼그라들어 보인다. 저 집 떡볶이는 솔직히 별로였다. 빵집도 보인다. 천 원에 2개였던 빵집은 맛보다 배를 채워주던 딱 고만큼 기억의 빵집이다.
맞다. 나는 곱창을 좋아했었다. 노점도 아닌 시장 모퉁이 길바닥에서 쭈그려 앉아 곱창을 팔던 할머니에게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곱창을 사갔다. 당면을 좀 많이 넣어달라며 넉살 좋게 웃으며 애교를 떨었었다. 포장지도 없어 검은 비닐 봉다리에 넣어준 곱창을 신나서 집으로 들고 갔었다. 소주 두 병과 함께. 만원에 행복도 아닌 오천원의 행복이었다. 지금은 곱창을 먹지 않은지 꽤 오래됐다. 사회라는 울타리에 맞춰 조금씩 개조된 사람처럼 입맛 역시 그 부산물이 되어 변했다. 비교적 자주 갔던 노점인 닭꼬치집은 사라졌다. 잔술도 팔았던 그래서 닭꼬치 한 개에 소주 세 잔을 사 마시던 그 노점은 다시 만날 수 없게 됐다.
창신시장을 한 바퀴 돈 후 그 족발집으로 향했다. 몇 달에 한번 특식으로 먹던 그 족발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다. 그것도 혼자서. 많으면 남기면 그만이다. 과거 창신시장에 저녁이 되면 가게들을 드나들며 꽃다발을 팔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이 생각이 났을 때 우연히도 꽃을 파는 사람이 가게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내 또래의 비교적 젊은 사람으로 바뀌었다. 꽃집을 차리는 게 꿈인데, 그 꿈을 위해 열심히 꽃을 팔고 있단다. 한 송이 샀다. 한 가지 또 달라진 건 현금이 없어도 계좌이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변화는 싫은 듯 좋기도 하다. 뜻밖에 우연은 과거 그때의 기억들을 알알이 깨어나게 했다. 뜻밖에 선물, 그래 몇 년 뒤에 또 보자. 창신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