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형 대안교육기관, 삼각산재미난학교 학부모의 24문 24답
도시형 대안학교, 삼각산재미난학교 학부모의 24문 24답
영정사진 대신 '인생네컷'
주변엔 의례 있어야 할 국화꽃도 향도 없다. 인상네컷 사진만 단출하게 걸려있다. 사진 아래는
"인생 뭐 없다"
는 글귀만 적혀 있다. 상주석 역시 없다. 그 자리엔 고인이 평소 사용하고 애정했던 물건들이 소품 가게의 매대처럼 전시되어 있고,
"고인의 뜻에 따라 빈소를 준비했습니다."
라는 안내 문구가 놓여 있다. 조문객들은 황당해하기도,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했다.
전시 테이블에는 고인이 직장 생활 내내 사용하던 '라미 만년필',
2018년에 주문 제작으로 만든 다이어리,
즐겨 마시던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커피와 드립커피세트 그리고 커피잔,
요리할 때 항상 사용하던 소금과 후추 글라인더,
애정하던 향신료 트러플오일,
인생 영화 '시네마천국'과 '미션'의 DVD,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
인생 책 '죽은 시인의 사회',
자주 마셨던 싱글몰트 위스키 '글렌그란트'와 버번위스키 '와일드터키'
그리고 글랜캐런잔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인의 뜻이 좀 고약하다.
장례식장에는 좌식 테이블도 없고, 원형 스탠딩 테이블만 몇 개 놓여있을 뿐이다. 육개장과 밥, 술과 음식은 제공되지 않는다. 커피숍처럼 음료와 사이드 메뉴를 주문하고 진동벨이 울리면 찾아가야 된다. 이것도 무상 제공이 아니다. 모두 돈을 받고 판매한다. 주문받는 곳에는
"고인의 뜻에 따라 모두 유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판매금은 전액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됩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마지막 작별에 순간까지 지인들의 지갑을 털어간다.
메뉴도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
음료는 딱 3가지.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딸기스무디. 사이드 메뉴도 마찬가지. 티라미수, 치즈, 초코쿠키가 전부다. 고인이 딱 좋아했던 것만 내놓는다. 마치
"마지막 가는 길인데, 오늘 하루만 내게 맞춰줄 수 없겠니?"
이런 꼬장을 부리는 것 같다. 몇몇은 고인이 평소 좋아했던 음식들을 먹어보며 '이런 것들을 좋아했었나?'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음악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끊김 없이 계속 흐른다. 집에서 노동요로 즐겨 들었던 영화 OST와 비발디 사계, 파헬벨 캐논, 파가니니 라캄파넬라 같은 클래식과 대중가요도 섞여 나온다. 내가 즐겨 들었던 음악과 함께 차 한잔 하며,
"잠깐 추억의 시간을 갖고 쉬었다 가"
라고 하는 것 같다. 테이블에는 역시 조문객의 지갑을 마지막까지 탈탈 쥐어짤 안내문이 준비되어 있다.
"준비한 조의금에 만원 더 보태기 캠페인! 마지막 가는 길에 좋은 일 하고, 천당 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조의금은 전액 기부됩니다!^^"
유족들은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
전시회의 도슨트처럼 장례식장의 컨셉과 고인이 좋아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슬퍼하는 이 보다는 전시된 물건들을 만지고 살펴보며, 이제는 고인이 된 나를 잠깐 떠올리고 옅은 미소를 짓는다.
장례식장 뒤쪽에는 삼각대에 설치된 핸드폰으로 이 상황을 유튜브 라이브로 실시간 중계한다. 먼 곳에서 오기 힘든 지인들은 유튜브로 조문하며, 방명록 대신 댓글을 남긴다. 유튜브 화면 하단에도 이런 자막이 떠 있다.
"유튜브 조문객은 절약된 교통비만큼 조의금 추가하는 센스! #전액기부 #덕분에천당가요~^^*"
실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없고 유족들 의지에 달린 문제니까.
귀찮을 수도 있겠고, '꼭 이래야 되나?' 싶을 수도 있겠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미리 유서로 근거를 남겨야겠다. 장례식을 저렇게 치러달라고.
친환경 미니멀리즘 기부형 스몰 장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