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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TV 625번 채널

하루 종일 한 곡의 음악만 들을 수 있다면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은 가요?

by B급 사피엔스


채널 625번. 내 노동요 취향은 아싸다. 사람들은 한마디로 ‘워우~’라는 반응을 먼저 보인다. 신나고 경쾌한 대중가요보다 클래식이 노동요이기 때문이다. 주말 아침, 식사 준비를 할 때면 일종의 의식처럼 먼저 TV를 켜고, 클래식 채널인 625번을 틀어 논다.


음식을 하면서 웅장한 음악이 나올 때면 나는 칼질이나 웍질을 하면서, 동시에 오만상 가슴 뭉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끔 휘젓기도 한다. 와이프는 이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꼭 저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걸까? 하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남들은 노동요로는 클래식이 흥이 안 난다고 하지만 나는 클래식의 웅장함이 좋다. 흥도 나고, 신남도 있다(물론 모든 클래식 음악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듣는 것 몇 곡만 반복해서 듣는다).


참교육의 산실인 삼각산재미난학교(실제 학교 이름이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학부모들 이 주축이 되어 학교 행사를 하는데, 먹거리 도우미를 자원했었다. 음식 준비를 하러 일찍 도착해 여느 때처럼 클래식을 틀고 칼질을 시작하는데, 곧이어 도착한 멤버가 음악부터 대중가요로 바꾼다. 노동요로 이 음악은 너무 정적이다는 것. 이해한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 아니다. 그나마 손가락질을 하지 않아 고맙기도 하다. 청소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집이나 학교나 내 노동요는 인싸인 적이 없다.


비교적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으로 ‘스테판 플레브니악’의 연주를 듣게 됐다.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에서 연주한 ‘비발디’의 ‘사계’를 봄부터 겨울까지 처음으로 들어봤다. 비발디 사계라 하면 ‘봄’만 유명한 줄 알았었는데, ‘여름’이 정말 경탄스러웠다. 여름의 광기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축축 쳐지고 땀방울이 흐르는 무더운 계절을 음악으로 어떻게 저렇게 표현하고, 연주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렇게 가슴이 웅장해져 버릴 때면 몸에서 충만한 에너지가 불끈 솟아난다.


출퇴근 길에도 가끔 듣다 보니, ‘파가니니’의 음악이 연관 추천으로 올라왔다. 고등학교 때 이름만 들었던 그 옛날 사람이 이렇게 대단한 위인이었을 줄이야. 대표곡으로 손꼽히는 ‘라 캄파넬라’와 ‘카프리스’는 바이올린 연주를 1도 모르는 나에게도 파가니니의 위대함을 깨닫게 했다. 아마 성인이라면 저 두 곡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TV나 여러 광고에서 배경 음악으로 자주 사용됐기 때문에 ‘아! 이거!’ 하고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최근엔 이 파가니니의 음악과 스테판 플레브니악이 연주한 사계, 전통의 강호 625번 채널이 노동요 3파전을 다투고 있다.


예전, 와이프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늘보씨는 성격은 고약한데, 생각보다 취미가 고상한 것 같단다. 커피도 직접 내려 먹고, 미술관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한다고. 딱히 고상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살다 보니 고약한 나도 이런 게 내 취향이라는 걸 하나씩 발견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중 노동요의 취향이 기묘하게도 클래식과 매치된 것이다.


일반적이진 않아 보이긴 하다. 클래식을 공부한 적도 어떤 조예도 없는 아저씨가 노동요로 클래식을 듣는다는 게 좀 이상해 보이거나, 고리타분해 보일지도. 그럼 뭐 어떤가? 노동요로 노동만 잘 되면 되지! 이번 주말도 클래식을 타고, 웍질이 불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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