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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12. 2020

프라하 국립미술관 2

알폰소 무하


19세기 말 유럽은 새로운 예술 사조로 물결쳤다. 바로 아르누보 양식이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누보는 수 세기 동안 유럽 예술의 근원이었던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고딕에서 탈피해 덩굴 풀이나 담쟁이 같은 꽃이나 식물 등 자연에서 새로운 모티프를 찾았다.


아르누보는 1895년 체코 출신의 예술가 알폰스 무하가 당시 파리에서 공연된 연극 <지스몽다>의 광고용 포스터를 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르누보 영식의 선구자인 무하는 모라비아 지방의 이반치체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성인이 되자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서 무대 배경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작업장에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다시 모라비아로 돌아가서 프리랜스로 장식 예술과 초상화를 그렸다. 당시 고향 마을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후원자의 도움으로 그는 뮌헨 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1887년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미술을 배우면서 동시에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렸다. 1894년 당시 유명한 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그렸는데 그의 아름다운 포스터가 큰 호평을 받자 그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이후 그는 그의 독특한 스타일로 많은 회화와 포스터 그리고 광고와 책의 삽화를 그렸으며 보석, 카펫, 벽지 등을 제작하였는데 당시 무하의 스타일은 엄청난 인기를 끌며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무하의 전형적인 회화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 네오 클래식 양식의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된 그림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했으며 언제나 그는 자신의 뿌리인 슬라브 민족이 받은 핍박과 애환을 담은 작품을 그리고 싶어 했다.


1906년 미국의 초대로 1910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그는 체코 공화국으로 돌아와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작품에 몰두하였다. 이후 18년 동안 그의 붓 아래에서 20개의 기념비적인 웅장한 작품이 나왔다. 바로 <슬라브 서사시>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이었던 시민회관과 의회 건물의 인테리어 작업을 했으며 곧 준공될 성 비투스 대성당의 메인 유리를 스케치했다. 또한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의 우표와 은행권 그리고 문서 등을 디자인했다.


1928년 그는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프라하에 이를 헌정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의 박해로 모라비아의 작은 성에 작품을 계속 숨겨두어야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무하의 애국심은 히틀러의 독일 정부가 그를 적으로 간주한 명부에 포함할 만큼 유명했다.


1939년 3월 프라하가 독일에게 점령된 후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서 심문을 가했다. 그 결과 무하는 폐렴을 앓게 되었고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이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2012년이 되어서야 그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공개할 수 있었다.


알폰스 무하가 고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노래한 <슬라브 서사시>의 첫 번째 작품은 <본향의 슬라브인>이다.
 


이 작품은 슬라브 민족의 평화로운 마을에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보여준다. 별이 총총한 검푸른 밤에 칼을 든 투르크 족의 약탈로 마을이 불타고 있다. 작품 앞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남녀 한 쌍이 웅크리고 있는데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공포와 전율이 가득하다.



그리고 오른쪽 하늘 위로 이들을 보호하고 위로하는 고대 슬라브족의 수호신이 보인다. 수호신은 각각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두 명의 인물에게 부축을 받고 있다. 오른쪽의 붉은 옷을 입은 전사는 전쟁을 상징하고 왼쪽의 나뭇잎 관을 머리에 쓰고 흰 옷을 입은 여성은 평화를 상징한다.



두 번째 작품이 <루야나 섬의 스반 토빗 제전>이다.


작품에서 왼쪽 하늘에 특사들과 화관을 쓴 대사제가 제물로 바쳐질 힘의 상징인 황소를 몰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맞은편에 슬라브 민족의 마지막 전사가 신성한 백마 위에서 죽어가며 스반 토빗 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다. 그 뒤로 침략자인 게르만 민족을 상징하는 떡갈나무가 보이지만 스반 토빗 신의 손에는 심장 모양의 잎이 달린 보리수 나뭇가지가 새롭게 자라나고 있다. 보리수나무는 슬라브 민족을 상징한다.



작품 아랫부분에는 핍박받는 슬라브 인들이 보인다. 특히 중앙에 아이를 안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표정에서 곧 닥쳐올 암담한 미래를 예감하는 듯 슬퍼 보인다.


무하가 오늘날 독일 영토에 속하는 루야나 섬에서의 스반 토빗 신의 숭배를 그려 낸 것은 슬라브족이 누렸던 과거의 영광과 자긍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후 <슬라브 서사시>는 수많은 전쟁과 종교 개혁의 혼란 속에 치열하게 투쟁하며 그들의 민족 영혼을 지켜 온 고난과 영광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 하이라이트가 다음의 두 작품이다.



대모라비아 왕국에서의 슬라브 예배의식 도입


작품은 대모라비아 왕국의 수도 벨리 그라트를 배경으로 모국어 예배의 시작을 기리는 작품이다. 궁정 안마당의 높은 자리에 측근들로 에워싸인 스바 토플 록 왕이 앉아 있고 그 앞에 주교와 귀족들이 있다.


왕의 앞에서 사제는 교황이 슬라브어 미사 집전을 허용하는 교서를 읽고 있다.


상단의 가장 왼편에 보이는 사람들은 프랑크족에 사람들로 그들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슬라브 민족에게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아래 모자가 달린 흰옷을 입고 머리 주변에 후광을 두른 사람은 형 메토디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천상에서 대모라비아 왕국을 수호하는 찌릴콘스탄틴이다.


바로 그 아래 원형 건물 앞에 보이는 무리들 속 중앙에 메토디우스가 보이며 그 양 옆으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부축하는 부사제들이 서 있다.


다시 작품 상단으로 와서 중앙을 보면 작은 배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명의 인물이 보인다. 이들은 988년 키예프 공국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성 블라지미르의 아들 글렙과 보리스로, 이들은 선원들의 수호신이자 상인들의 보호자로서 이글에 의해서 슬라브 민족 사이에 그리스도교가 닻을 내리게 됨을 상징한다.


화면 오른쪽 공중에 비잔틴 미술의 이콘처럼 묘사된 네 사람은 9세기 중엽에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불가리아 제국의 보리스 1세 부부와 9세기 키예프 러시아를 세운 이고르 1세 왕 부부이다.



한편 작품 아래 왼쪽에서 앞에서 오른손에 원을 들고 왼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는 젊은이는 슬라브 민족의 힘과 화합을 상징한다.



세르비아의 왕 슈테판 두샨과 그의 대관식


슈테판 두샨은 1346년 부활절에 오늘날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에서 세르비아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치르고 나서 자신이 고대 로마를 계승하고 있음을 선포했다. 이 작품은 대관식 직후의 행렬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투구와 허리띠 그리고 검을 받쳐 든 유력자들이 행렬의 선두에 서 있다. 중앙에는 호화로운 대관식 가운을 입은 황제가 보이며 그는 손에 권력의 징표인 곤봉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황제와 황후가 가는 길에 여인들이 꽃을 뿌리고 있다.



황제의 아들이 그 뒤를 따르고 바로 뒤에는 대관식을 거행한 세르비아 정교회 장로가 따르고 있다. 성직자와 유럽 황실의 특사들 귀족과 하객들이 행렬 후미에 있다.


호화롭게 차려입은 귀부인들이 높은 연단에서 새로운 황제를 환영한다. 성당 앞쪽에 나란히 선 기사들도 황제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행렬 속에는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자 카를 4세의 특사도 있다.


카를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고 슈테판 두샨은 동로마제국을 계승한 황제였다. 무하는 신성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의 영광이 슬라브 인들의 손에 있었던 시대를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무하의 대 서사시는 마지막 작품은 <슬라브 민족의 역사 찬미>로 끝난다.



이 작품에서 무하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요약해 네 가지 상징적인 색으로 표현했다.


먼저 작품 하단의 푸른색은 신비로운 고대를 표현하면서 본향의 슬라브 인들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검은색은 억압의 시대를 상징한다. 이는 프랑크족과 투르크족의 공격과 빌라 호라 전투 패배 이후 거의 300년에 달하도록 지속된 암흑의 시대를 나타낸다.


다음 붉은색은 보헤미아 왕국의 프르제미슬 왕조와 황제 카를 4세의 영광과 얀 후스의 종교개혁사상 그리고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작품 중앙의 황금색은 기쁨과 자유를 상징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이후 여러 슬라브 민족이 자유를 얻었다.


작품에서 전쟁에서 귀환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의용군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세르비아 병사들을 사람들이 보리수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영한다.


또한 다채로운 슬라브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화환을 엮고 독립을 기념하는 커다란 깃발을 준비하고 있다. 드디어 자유를 맞이하게 된 감격에 벅차 하늘을 향해 고마움을 표하는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국기가 휘날리고 여러 슬라브 민족의 대표자들이 서 있다. 가장 크게 표현된 것은 승리와 화합의 화환을 손에 들고 있는 슬라브 젊은이의 모습이다. 무지개 아래에서는 그리스도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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