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국립미술관 2
의자에 앉은 채 어머니가 죽음을 받아들이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 앞에서 기도하는 아버지와 의자를 잡고 있는 누나 그리고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뭉크 등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한다. 한 손을 벽을 대고 절망하는 남동생과 의자에 앉아 흐느끼는 여동생은 슬픔에 차 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막내 여동생은 쾡한 눈으로 앞만 보고 있다. 작품 전체에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이 녹색톤의 벽과 붉은색 바닥과 대비를 이루며 슬픔을 강조하고 있다.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있는 <병실에서의 죽음>이다.
이 작품은 뭉크가 다섯 살 때 결핵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해 그린 작품이다.
뭉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섯 남매는 모두 어렸다. 하지만 그는 남매의 모습을 모두 그림을 그릴 때의 현재 모습으로 그렸다. 누나만 어릴 때 죽어 그녀의 모습을 그릴 수 없어서 이모의 모습으로 그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이모는 스물아홉 살이었고 누나가 살아있었다면 서른 두 살이었다.
하얀 시트가 덮인 병실의 침대와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로이뎅 근처 엔겔호이크에서 군의관인 아버지와 학자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뭉크가 태어나자 일가는 오슬로로 이사를 했다. 뭉크는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서 그가 다섯 살이었을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은 불행을 맞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하류층을 상대로 한 병원을 개업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성격은 거칠면서도 편협적으로 변했다.
어머니 대신 가정을 맡아 돌봐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 나이 14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어려서부터 죽음의 그늘이 떠나지 않았던 뭉크는 늘 우울했다. 후에 그가 그린 <병든 아이>는 누이 소피에의 모습으로 그녀에 대한 깊은 추억이 담겨 있다.
작품 속에서 반쯤 눈을 감은 소녀의 옆선은 흐릿하게 표현되어 옅은 색깔의 배게 위로 흩어지고 있다. 뭉크는 이러한 회화적 표현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소녀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뭉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적성이 맞지 않자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오슬로 국립 공예학교에 입학하여 크리스티안 크로그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당시 그는 크로그로부터 뛰어난 화화 기술과 색채를 배웠으며 크로그 역시 뭉크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1889년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유학한 뭉크는 마네와 고호 그리고 고갱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뭉크는 예민한 감수성으로 인상파의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카를 요한 거리의 군악대> <병든 아이><사춘기> 등이 있다.
18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파리 서쪽에 있는 생 클루로 이사를 하고 이 곳에서 <생명 프리이즈> 연작을 구상한다. 생 클루에 머물면서 그가 쓴 일기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따위의 그림은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느끼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뭉크는 1899년 당시 상징주의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사랑 열정 고통을 뜻하는 붉은색과 젊음 순결 환희를 상징하는 흰색 그리고 고독 비애 죽음을 나타내는 검은색 등 인간이 지닌 다양한 감정을 색으로 표출하였다.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커플들과는 달리 그림 중앙에는 붉은 드레스의 여성과 드레스에 휘감긴 뭉크가 무엇을 할 줄 모른 체 멍하니 서 있다. 양 옆에는 축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암울한 분위기의 두 여성이 중앙을 향해 외롭게 서 있다. 이는 뭉크의 자화상인 동시에 인간의 욕망인 기쁨과 고통을 상징한다.
1892년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뭉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해 오슬로로 돌아와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혁신적인 그의 작품은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보수적인 당시의 화단은 주관주의적인 뭉크의 작품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개인전은 중지되었지만 상대적으로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또한 그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내는 예술가와 시인 그리고 평론가들이 늘기 시작했다.이후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독일과 노르웨이 그리고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악화된 건강을 돌보는 한편 새로운 작업을 위해 매진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는 알코올 중독과 노이로제 그리고 정서적 강박 관념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으며 1908년 코펜하겐의 야곱슨 교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퇴원을 한 후에는 오슬로 대학의 페스티벌 홀의 벽에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기는가 하면 1912년에는 쾰른에서 개최된 분리파 대 전람회에서 세잔과 고호 그리고 고갱과 함께 전시회를 여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1937년에는 칸딘스키 등과 함께 퇴폐 예술이란 낙인을 찍힌 그는 나치에게 작품을 압수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1944년 1월 23일 나이 80세에 그는 유명을 달리했다.
뭉크의 회화는 대상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회화로부터 벗어나 죽음에 대한 갈등과 수용 그리고 인간의 원초적인 불안 등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완성하였다.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자.
다리 위의 소녀들
여름 저녁에 세 명의 소녀들이 다리를 건너다 나란히 멈추어 서서 다리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소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흰색과 빨강 그리고 연두색의 단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편안한 차림과 모자로 보아 그녀들은 아마도 휴가여행을 떠나온 것으로 조인다.
소녀들의 밝은 색 드레스는 녹색과 황토색으로 이어진 길과 다리 위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그림의 배경이 된 북유럽의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 점차 짙어지는 어스름을 보면 제법 늦은 시각이 분명한데도 하늘에는 아직 빛바랜 노란 해가 하늘 끝에 걸려 있다. 또한 커다란 침엽수와 하얀 집들의 전경이 흐르는 물 위에 일렁거리며 비치고, 소녀들이 서 있는 다리와 멀찍이 있는 흰색 담 밑의 황톳빛 땅 역시 흘러가는 물결처럼 부드럽게 채색되어 있다. 흐릿한 소녀들의 뒷모습과 맞물린 이 장면은 여름 저녁이라기보다 꿈속의 한 풍경처럼 목가적이면서 환상적이다.
뭉크는 이 작품에서 강렬한 색채와 빛 그리고 명암을 대담하게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균형을 잃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또한 원근법을 강조하며 비스듬히 놓인 다리와 길을 통해 흐르는 리듬감을 가미해 작품 전체적으로 상당히 명쾌한 느낌을 준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이며 낭만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 역시 자연의 한 조각임을 보여주고 있다.
마돈나
뭉크에게 여성은 마돈나이면서 메두사이다. 그에게 여성운 저항할 수 없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이지만 또한 반대로 남성들을 파괴할 정도의 치명적인 마력을 지닌 존재였다.
뭉크에게 이러한 여성관은 젊은 시절 자신을 배신한 여인의 증오에 기인한다.
1892년 독일로 건너가 미술 활동을 시작한 뭉크에게 초반 작품 활동은 쉽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우울하고 난해한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옛 친구 다그니는 한 줄기 빛이었다. 다그니는 뭉크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주며 그가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했다. 곧 두 사람은 연인이 됐고 이 기간 동안 뭉크는 여러 걸작들을 그려냈다. 이는 독일 예술계에 그의 입지를 점차 넓히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다그니는 갑자기 뭉크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다그니가 자신의 친구와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와 연인에게 배신을 당한 뭉크는 두 사람을 원망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다그니가 자신에게 돌아오길 바라는 그림을 그려나갔지만 결국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렸다. 다그니에 대한 원망과 희망은 증오로 변했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마돈나>이다.
그는 다그니를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인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마돈나를 작품의 제목으로 채택하여 다그니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하고는 남성을 유혹하는 겉과 다른 모습의 요부로 묘사하고 있다.
작품에서 마돈나는 황홀한 듯 눈을 감고 있지만 입술을 꼭 다문채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다. 도도하면서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퇴폐적인 기운이 마돈나의 몸을 감싸고 있다. 검은색과 베이지색의 배경이 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오직 빨간색의 후광만이 그녀가 성스러운 여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절규
우울하면서 복잡한 붉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다리 난간에서 한 인물이 공포에 질린 채 일그러진 얼굴로 절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절규에 저도 모르게 귀를 막고 있으나 그 무서운 상황으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절규는 바로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 높여 우는 인간은 파도치는 구름과 강물의 리듬처럼 주위와 하나가 된다. 하늘과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물도 악몽처럼 메아리친다. 뭉크는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고야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괴물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색과 형태로만 시각화하며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 관해 작가인 뭉크 자신이 이런 말을 하였다.
어느 날 해 질 녘에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밑으로는 강줄기가 돌아나가고 있었다.
마침 해가 떨어지려던 때여서 구름이 핏빛처럼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절규가 자연을 꿰뚫으며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절규를 정말 들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