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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17. 2020

오슬로 국립 미술관 1

자연과 조국을 노래한 노르웨이의 화가들

그림 속 배경이 되는 피요르드의 자연은 말할 수 없이 맑고 아름답다. 강대국에 예속된 국가에서 태어난 화가의 눈에  비친 조국의 자연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웠을까?


화가는 한 땀 한 땀 조국의 아름다움을 정성스럽게 그려냈다. 그리고 그 속에 가장 찬란한 시절, 선조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작품이 바로 노르웨이가 가장 사랑하는 <하르당에르 피요르드의 신부 행렬>이다.


1848년에 완성한 이 작품에서 한스 구데는 풍경을 그렸으며 티대맨드는 신부 행렬 장면을 그렸다.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을 가진 노르웨이 왕국은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들어갈 무렵인 1905년 스웨덴 왕국에서 독립했다.


원래 스웨덴과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크는 형제국가처럼 지내왔다. 1300년대 중반 흑사병으로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은 노르웨이는 자력으로 살아가기 힘들어서 덴마크와 400여 년간 연맹을 맺어 국가 기능을 의존해왔다. 그리고 이후 덴마크 대신 스웨덴과 연맹을 맺어 생존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연맹이라 하더라도 국력의 열세 탓에 사실상 지배와 예속관계였던 스웨덴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들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은 스웨덴이 중립을 명분으로 재빨리 독일군에게 길을 열어줘 노르웨이가 초토화된 것이 민족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후 노르웨이는 입헌공화제를 채택하면서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노르웨이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국가적 낭만주의 예술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당시 노르웨이  예술 기관은 모든 문화 영역에서 노르웨이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찾는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작품을 살펴보면 하드랑에르 피요르드를 가로지르는 전통적인 신부 행렬의 장면을 생생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자연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전통 의상을 입고, 신부파티를 즐기고 있는 인물들의 표정에서 환희와 존엄이 느껴진다. 본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을 보면서 당시 노르웨이 사람들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높였다.


다음 솔베르그의 <산속의 겨울밤>을 감상하자.



이 작품은 구름이 없는 깊고 푸른 저녁 하늘 아래 눈으로 덮인 산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의 전경은 풍화 나무의 검은 윤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작품 전체는 사람이나 동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오직 신비하고 경건한 산만이 대칭을 이루며 화면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균형 잡힌 두 산 사이에  밝은 별 하나가 보인다.


이 작품은 1995년 노르웨이 국영 방송사인 NRK가 주최 한 공개 투표에서 <하르당에르 피요르드의 신부 행렬>을 누르고 노르웨이의 국화로 선정되었다. 솔베르그는 1900년 초에 외스터 달렌의 산 근처에서 스키를 타던 중 푸른빛이 도는 달빛 아래의 이 광경을 보고 압도당하여 이 곳으로 이사와 2년 동안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에일리프 페테르센의 <토르벤 옥의 사형 선고에 서명하는 크리스티안 2세>를 감상하자.  


이 작품은 덴마크의 마지막 가톨릭 왕인 크리스티안 2세가 코펜하겐 성의 주지사로 임명된 귀족인 토르벤 옥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을 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517년 왕의 정부가 갑자기 병사했고, 정부의 어머니는 딸을 토르벤이 독살했다고 고소했다. 그 고소로 왕은 토르벤의 사형 집행을 명했다. 왕 옆의 고문이 영장 서명을 위해 펜을 건네고 있고 의자의 팔걸이에 올린 왕의 손을 붙잡고 이자벨라 여왕은 눈물로 사형 집행에 서명하지 않도록 간청하고 있다.


간교한 고문의 눈빛과 간절한 여왕의 눈빛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있는 왕의 눈빛에서는 머뭇거림이 느껴진다. 화면 끝 눈물로 범벅인 채 묵주를 돌리면 기도하는 노파는 토르벤의 어머니이다. 결국 왕은 토르벤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고 토르벤은 참수되었다. 그러나 그 토르벤의 사형 집행은 정치적 파급 불러왔으며 크리스티안 2세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 작품을 그린 에일리프 페테르센은 노르웨이 리얼리즘 운동의 선구자로 역사적인 그림 외에도 풍경과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중 초상화에 뛰어났다.


다음 작품은 크리스티안 달의 작품이다.



피요르드 한쪽에 있는 스퇴고뇌제 산을 그린 이 작품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웅장함을 보여준다.


푸른 하늘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갈라지는 순간 햇빛이 봉우리를  극 중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산 허리에 순록 세 마리가 보이고 언덕 위에는 수많은 순록 떼가 노닐고 있다. 바로 앞 무리에서 벗어난 세 마리의 순록이 연극의 주연들이라면 언덕 위에 순록 떼는 조연들로 마치 장엄한 순록의 공연을 감상하는 것 같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저  멀리 눈으로 뒤덮인 만년설이 웅장함을 더한다.


이 작품은 크리스티안 달이 몸이 쇠약해져 마지막 고국 여행 때 스케치한 것을 자신의 화실에서 완성한 것이다.그가 죽음에 임박하여 마지막 여행에서 스케치하였던 고국의 산하를 그리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요한 크리스티안 달은 베르겐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코펜하겐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818년 독일 드레스덴에 정착해 평생을 살았다. 1824년 드레스덴 미술학교 교수가 된 그는 <노르웨이 풍경화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매년 여름이면 고국을 방문하여 산과 강 그리고 피오르드의 풍경을 그렸다.


섬세하게 묘사한 그의 풍경화에서 노르웨이 자연의 웅장함과 숭고함이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작품을 감상하자.



그리스티안 크로그는 화가이자 소설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 타락한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 <알베르티네>를 적어 유명해졌다. 소설의 내용은 가난한 여자 재봉사인 알베르티네가 부패한 경찰관 윈터에 의해 강간을 당하지만 경찰서에서 의사를 면담한 이후 매춘부로 몰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로 인하여 크로그는 많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작품은 알베르티네가 경찰서를 방문하는 모습이다. 작품 안에 보이는 인물들은 대부분 매춘부로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에드바르 뭉크의 스승으로 노르웨이의 지도층 집안 출신이었지만 주로 여성과  빈민 그리고 육체 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이어서 감상하자.



<병든 소녀>를 그린 이 작품은 19세기 오슬로를 휩쓸었던 폐렴으로 인하여 한 소녀가 병든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누구에게나 전염병과 죽음이 평등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진을 보는 것 같이 사실적으로 그린 이 작품에서 소녀의 눈 밑에 보이는 붉은 자국이 그녀가 들고 있는 장미의 색깔로 이어지며 작품 발표 당시 이미 세상을 등진 소녀에 대한 동정심과 슬픔을 자아낸다.


다음 작품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한겨울에 오슬로의 가장 번화한 칼 요한 거리에서 빈곤층 의 여성과 아이들이 공짜 빵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사람들은 허름한 옷을 입고 음식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를 움켜쥐고 있다. 그들 위로 몸이 보이지 않는 손이 기둥 안에서 빵 한 개를 그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어제의 빵이었다. 이제 제빵사는 그것을 팔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하지만 오슬로에서 가장 번화하고 큰길에 절박하고 가난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황량하다. 단지 두꺼운 코트와 모피 모자를 쓴 경찰관이 저 멀리서 얼음길 한복판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다. 이 비관적인 주제의 작품을 끝으로 크로그의 작품 속에 항상 존재해왔던 사회적 현실주의는 끝났다. 크로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감탄하고 경애하고 방법을 가르쳐준 건
길고 긴 새벽의 어둠이었다.

어둠을 몰랐다면
내 곁에 맴도는 빛의 축복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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