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봉기 Sep 22. 2020

스톡홀름 여행

북구의 베니스

북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스톡홀름은 수많은 운하가 섬들을 에워싸고 있어 <북구의 베니스>라고 불린다. 화려한 베네치아와는 달리 스톡홀름은 오래된 것과 새것이 어우러진 도시로 수백 년 전의 구시가지와 세련된 신시가지가 강을 사이에 두고 공존한다.


16세기 이후 스톡홀름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감라 스탄에는 왕궁을 비롯해 대성당과 법원 그리고 국회의사당이 있다. 현재 주요한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거주하는 이 곳은 16세기부터 건립된 중세의 건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감라스탄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스톡홀름의 주요한 역사 유적지들을 다 만나볼 수 있는데 이 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왕궁이 보인다.


13세기 지어진 왕궁은 현재 스웨덴의 국왕인 칼 구스타프 16세가 집무하고 있는 곳이다.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과 프랑스 로코코 양식이 조화를 이룬 이 건물은 원래 바사 왕이 1523년 스톡홀름으로 수도를 옮긴 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었는데, 1697년 화재로 거의 전소한 후 1754년 지금의 모습으로 건립됐다.


1982년 국왕과 그 가족이 근교의 드로트닝홀름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가자 현재는 외국 국빈을 위한 공간과 국왕의 집무실, 그리고 왕실의 주요한 행사를 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궁의 일부는 일반인에게 공개를 하고 있다.



왕궁을 입장하면 왕실이 사용했던 침실과 영빈관 그리고 만찬회장을 방문할 수 있다. 특히 만찬회장에서 450kg의 거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왕족이 사용하던 은그릇 그리고 고급  페르시아 융단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보물실에서 역대 국왕과 여왕의 보물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중 엔리크 14세의 왕관과 왕홀 그리고 지휘봉이 압권이다.



23 캐럿의 금과 진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및 루비로 장식된 엔리크 14세의 왕관에는 정의와 용기, 지혜, 절제, 충절, 희망 및 사랑 등 일곱 가지 왕의 기본 덕목을 의인화한 작은 여성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왕홀은 로마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왕이 세상의 지배자임을 상징하기 위해 지구본에서 그 모양을 가져왔다. 이 홀은 에릭 14세가 1568 년에 거행된 그의 결혼식 때 사용한 것으로 바다와 배 그리고 해양 생물이 새겨져 있다.

왕의 지휘봉은 에릭 14 세의 대관식에 사용된 것으로 머리 부분에 사파이어로 장식되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금으로 장식된 열쇠는 악의 문을 나와 선으로 둘러싸인 왕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외 왕실 예배당과 가장무도회에서 살해된 구스타보 3세의 피 묻은 옷과 권총 그리고 가면을 전시한 왕궁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다.  



왕궁을 나오면 대성당이 보인다.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279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여러 차례의 증 개축을 통해 1480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원래는 고딕 양식이었으나 후에 왕궁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오랫동안 국왕과 여왕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있었던 이 곳에는 바로크 양식의 설교대와 용을 무찌른 성 조지의 동상이 있다.



<성 조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마을에 사나운 용이 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용에게 매일 양을 바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용은 마을 사람들을 먹이로 요구했고 백성을 사랑했던 왕은 결국 공주를 괴물에게 바치게 되었다.


그때 성조지가 나타나 용과 엄청난 싸움을 하게 되고 마지막에 성 조지가 용을 창으로 찌르자 용의 피가 장미로 변하며 용은 죽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공주와 결혼을 허락하였으나 성 조지는 작은 교회 하나만을 지어달라는 이야기를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


성당을 나와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750년 전의 구 시가가 여행자의 발길을 재촉한다.


오래된 건물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이어지고 13세기 중세 사람들이 밟기 시작했을 닳고 닳은 바닥의 조약돌에는 사람들의 표정과 애환이 담겨 있는 듯하다. 서민의 애환을 담은 감라스탄의 골목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아이언 보이>이다.


이 소년은 고아로 원래 배에서 짐을 내리고 옮기면서 겨우 먹고살 수 있었는데 평소 자기보다 더 어린 또 다른 고아들을 돌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는 감라스탄의 한적한 골목에서 배고픔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가 숨지고 말았다. 그래서 아이를 기리기 위해 청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 동상은 여름엔 맨머리로 있지만 겨울엔 실로 짠 작은 모자가 씌워진다. 어느 겨울 한 여행자가 동상이 추워 보인다며 그렇게 한 것이 지금의 전통이 됐다. 이 동상 앞에 던져진 동전은 핀란드 교회에 의해 전 세계 고아 어린이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된다.



감라 스탄의 가장 높은 , 모든 골목들이 방사형을 이루다가 모이는 곳에 대광장이 있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곳의 중세 건물들은 영화  세트장처럼 고풍스러우면서 아름답다.


광장 중앙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1520년 스웨덴을 지배하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는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스톡홀름의 귀족 90명의 목을 쳐서 죽였다. 그리고 그 머리들을 한 곳에 모아 묻었는데 그 이후로 이곳을 <해골의 샘>이라고 부른다.


이 날 죽은 귀족 중에는 바사 왕의 아버지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스웨덴 농민과 귀족들이 구스타프 바사 왕의 지휘 아래 덴마크에게 저항하여 결국 1523년 스웨덴에서 덴마크의 세력을 몰아내게 되었다.

광장 한편에는 노벨 박물관이 있다. 원래는 스톡홀름 증권거래소로 쓰이던 건물인데 지난 2001년 노벨상 100주년을 기념해 노벨박물관으로 새롭게 꾸몄다.


안에는 노벨상의 역사와 역대 수상자들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한과 이희호 여사가 뜨개질해 준 털신이 전시되어 있어 뭉클함이 느껴진다.



1833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노벨은 아버지와 형 그리고 동생 모두 발명가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학에 특별한 관심과 재능을 보였으며 차츰 성장하여 그의 아버지 공장에서 일을 배우며 폭탄 기술과 관련된 일을 습득했다.


당시 노벨은 광산용 폭약 대신 고성능 액체 폭약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실험 도중 폭약이 폭발해 동생을 비롯한 다섯 명이 사망하는 불운한 사고를 겪기도 한다. 이후 실험을 계속한 결과 세계 최초로 고성능 폭약을 계발하여 철도 터널 공사에 사용되면서 엄청난 부자가 된다.


1888년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사망 소식의 기사를 접하고 깜짝 놀란다.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죽음의 상인 죽다.
전보다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노벨이 어제 사망했다.    


자신의 형이 죽은 것을 잘못 보도한 기사를 보고 노벨은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자신의 죽음을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벨은 자신의 이름이 보다 값지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노벨 재단에 기부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날 노벨상이 만들어졌다.  



감라스탄을 나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다리를 건너면 스톡홀름 여행의 백미라고 할 시청사가 나온다.


노벨상 시상 장소로 유명한 시청은 스톡홀름 신시가지의 상징물답게 붉은 벽돌로 외벽을 화려하게 감싸고 있으며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첨탑은 투박하면서 웅장하다. 북유럽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하는 시청사는 스웨덴의 유명한 건축가인 라그나르 오스트베리의 설계로 무려 약 800만 개의 붉은 벽돌과 약 1,900만 개의 금박 모자이크를 사용해 12년 만에 완성하였다.



시청사에 도착하였다면 바다로 열려 있는 시청의 정원을 먼저 감상하자. 거대한 스케일로 시원하게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정원에 서면 그리스 신화에서 코발트 빛 하늘 아래 떠나간 연인인 테세우스를 기다리는 아리아드네의 진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가이드 투어로만 가능한 시청사의 견학은 1층 <블루홀>부터 시작한다. 건축가는 <블루 홀>의 벽돌 벽을 파란색으로 페인트칠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빨간 벽돌이 주는 아름다움을 보고 나서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블루 홀>이 스톡홀름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 들어서면 아치형 기둥과 높은 벽으로 중세 이탈리아 광장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창문을 높게 설계해 햇빛이 부족한 나라답게 채광 효과를 높였다. 특히 이곳에는 10,000개의 파이프와 135개의 스톱을 갖춘 북유럽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12월 10일 노벨상 수상 축하 만찬이 이루어진다.



다음은 스톡홀름 시의회 소속인 101명의 의원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는 대회의실을 감상한다. 대회의실의 회의는 방문객들에게도 공개되며 회의실 한쪽 벽면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반대쪽에는 언론인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대회의실에 들어서자 나무로 만든 높은 천장과 벽의 장식이  눈에 띈다. 목조 천장은 바이킹 시대의 롱 하우스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진 것이고 벽의 장식은 고대 룬 문자를 형상화하여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룬 문자는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14세기까지 게르만 민족 사이에서 사용한 문자로, 바이킹 시대라고 불리는 8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스웨덴에서 발달하였다.


룬 문자는 한자와 같이 소리를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의미를 가지고 있어 주로 신으로부터의 신탁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어 성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크리스트 교회가 북구의 뿌리내리면서 고대 신에 대한 신앙을 탄압하였으며 결국 룬 문자는 사람들로부터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시청사의 최대 볼거리는 <골든 홀>이다. 노벨상 시상식 후 축하 연회가 열리는 44m의 연회장인 이곳은 최대 7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골든 홀>의 벽에는 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스웨덴의 역사가 1,800만 개의 유리와 금박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앙에  <멜라렌 호의 여왕>   스톡홀름을 인간으로 의인화한 여왕이 왕좌에 앉아 있으며  옆으로 다른 여러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과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방은 노벨상 수상 파티의 무도회장으로 사용된다.



시청사를 나와 시청사의 타워에 올라가면 왜 스톡홀름을 북구의 베니스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미니어처를 모아놓은 것처럼 형형색색의 집과 건물들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타워가 넓지 않아 시간당 올라가는 인원을 제한하니 미리 예약해서 빼먹지 말고 감상하자.  

이전 05화 뭉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