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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Sep 25. 2020

스톡홀름 박물관 지구

유르고덴 지구

스톡홀름 시내에서 10분 거리에 5개의 박물관들이 몰려있는 유르고덴 지구가 있다. 이곳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박물관이 바사호 박물관이다. 바사호 박물관은 스웨덴의 최고 전성기 시절에 만들어진 전함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1628년 첫 항해 30분 만에 침몰해 버렸다. 그리고 이 비운의 전함은 333년 만에 인양되어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발트해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는데 이를 위하여 막강한 해군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함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만든 것이 바로 바사호이다.



길이 69m, 높이 48.8m, 탑승 가능 인원 450명인 바사호는 탑재 가능한 대포 수량이 64개에 이르는 거대한 전투함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을 하자마자 수 분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배에 승선하고 있던 150여 명 중 3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익사했다.


바사호사 침몰한 이유는 전함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대포를 무리하게 실은 결과였다. 돌풍에 기울어진 바사호는 다시 서지 못하고 축포를 쏘기 위해 열린 포문으로 물이 들어와 침몰하게 되었다.


침몰한 바사호는 1956년 해양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에 의해 발견되어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는데 그때 25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바사호 박물관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배의 선박 바닥을 받치는 목재인 용골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총 6 곳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바사를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은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에서는 바사의 준공과 침몰 그리고 인양의 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바사호의 뱃머리와 후미를 장식하였던 사자와 천사 그리고 사람들로 구성된 700여 개의 눈부신 조각상은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사 박물관에는 바사호뿐만 아니라 당시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선원들의 유품과 유골 그리고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배에서 실제 사용하던 도구와 그릇 그리고 선원들의 신발 등이 과거 침몰 당시 스웨덴 사람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바사 박물관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바이킹 박물관이 나온다. 이 곳을 방문하면 바이킹의 선박 건조 기술과 농장의 일상생활에 대해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다.



특히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실내 기차를 타고 바이킹의 모습들을 여행하는 어드벤처 라이드를 통해서 서쪽에서는 약탈하고 동쪽에서는 노예무역을 하는 바이킹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바이킹은 본래 북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았으며 스칸디나비아 연안이 삶의 주 터전이었다. 오늘날의 덴마크와 노르웨이 및 스웨덴 사람들이 모두 바이킹의 후예다. 혹독한 자연조건 때문에 바이킹은 생계가 어려웠다. 농토가 부족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침략을 일삼았다. 영국과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를 공격하는가 하면 심지어 스페인과 이탈리아 해안까지 습격해 보물을 약탈했다.


그들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으며, 상당수의 포로는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8세기 후반부터 약 200년 동안 바이킹은 유럽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침입자였다.



외부적으로 잔인한 약탈자로 알려진 바이킹이었지만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평화를 추구했다. 바이킹족 대부분은 어부와 농부였다. 또 바이킹 사회에는 솜씨가 탁월한 금은세공업자도 많았다. 해적질에 종사한 바이킹은 부족장 휘하의 몇몇 용사뿐이었다.


부족장은 따뜻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거할 수 있는 옆으로 긴 집을 지어놓고 식솔들을 많이 거느렸다. 그는 평소에는 평화를 구가하며 살았으며 전쟁하기 좋은 여름철에는 바다로 나아가 약탈을 일삼았다. 부족장이 집을 비우면 그의 아내가 집안을 다스렸다.



바이킹 시대부터 북구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추운 날씨에 육체노동을 하려면 높은 열량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이킹은 술이 셀수록 남자답고 영웅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처음부터 독한 증류주를 마셨다. 1879년 스웨덴 출신의 라스 올슨 스미스가 <앱설루트> 보드카를 처음으로 생산하였는데 현재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바이킹의 요리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건빵인 크네케브뢰드가 특히 유명하다. 바이킹은 용선을 타고 여러 날 동안 굶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말린 빵 크네케브뢰드를 씹거나 연어와 청어를 소금에 절인 것을 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로는 러시아 요리가 전해졌고 교역로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음식도 들어왔다. 또한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감자까지 합류해 식탁은 제법 넉넉해졌다. 바이킹 시대부터 사람들은 여러 음식을 늘어놓고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접시에 담아 먹었는데 이것을 바이킹 음식이라고 불렀다.


바이킹 사람들은 체구도 크고 게걸스럽게 먹어 당시 프랑스처럼 코스별로 음식이 조금씩 나오는 것으로는 도저히 욕구를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먹고 싶은 만큼 음식을 가져오고 부족하면 다시 가서 음식을 떠 와야 분이 풀렸다. 이러한 바이킹 음식이 오늘날 뷔페의 기원이 되었다.


오늘날 스웨덴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다. 이는 바이킹 시절 부족 구성원 회의에서 평등한 권리와 사회적 합의를 존중했던 문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보다 부족장이 자리를 비울 시 아내가 부족장을 대신하던 전통에서 평등의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스웨덴의 과거 생활을 보여주는  스칸센 야외 박물관을 감상하자.



우리나라 민속촌과 같이 타임머신을 타고 200년 전의 스웨덴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스칸센 박물관은 전통 가옥과 공방 그리고 교회 등 옛 스웨덴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또한 공원의 예쁜 자연과 북유럽의 야생 동물들을 포함한 다양한 동물들이 놀고 있는 야외 동물원을 구경하다 보면 그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스칸센 박물관을 입장하여 왼쪽으로 가면 스웨덴 전통가옥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서 150채가 넘는 다양한 전통 가옥이 있어  그 내부를 둘러볼 수 있어 당시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이 곳에는 옛 냄새가 물씬 나는 베이커리와 도자기 공방 그리고 인쇄소와 유리 공방 등 다양한 가게들이 있다.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장인들을 만나 바로 제품을 구입할 수도 있으며 기회가 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만 볼 수 있는 동물들과 북유럽 야생동물 등을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야외 동물원과 수족관을 방문하여 자연 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다음은 방문할 곳은 1970년대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던 스웨덴 혼성 그룹 아바를 기념하는 아바 박물관이다.



아바 팬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이곳에는 아바 탄생 전부터 활동기 그리고 해체 후의 모습까지 아바의 모든 것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아바의 수많은 앨범들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골든디스크들을 볼 수 있으며 실제 아바가 입었던 화려한 무대 의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아바의 작업실과 녹음실을 방문하여 노래를 부르며 아바의 5번째 멤버가 될 수 있는 오디션에 참가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인기 코스로 진짜 아바를 만났다고 착각할 만큼 아바와 똑같이 생긴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어 아바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삐삐와 무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유니바켄으로 가야 한다.


유니바켄은 북유럽의 여러 동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테마 박물관으로 스웨덴의 유명한 삐삐를 비롯한 무민 등의 다양한 캐릭터를 접할 수 있다.


박물관에 입장하면 동화 속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놀이터와 미니어처가 나온다.



여기서 스토리 트레인을 타면 15분 동안 꾸며진 미니어처 공간을 구경하며 동화를 들을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삐삐와 무민의 집이다.



우리가 아는 삐삐는 애칭이며 풀 네임은 삐삐로타 빅투 알리아 룰 가르디나 크루스뮌타 에프라임스도테르 롱스트룸프이다. 이 긴 이름은 작가의 어린 딸이 어느 날 생각해 낸 이름이다. 스웨덴의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집필한 삐삐는 동화 속에서 엄마를 일찍 여의고 선장이었던 아빠가 바다에 실종되면서 외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삐삐는 슬픔에 빠져 있기에는 너무나 씩씩하고 활달한 아이였다.


삐삐는 학교를 빠지며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개성 강한 아이였다. 부모 없이 혼자 살고 있지만 원숭이 한 마리와 말 한 마리 그리고 금화가 가득 들은 가방을 가지고 있어 소녀는 언제든 마음껏 모험을 즐길 수 있었다.당시 삐삐는 어른의 간섭과 지배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어른들에게는 지독한 말썽장이었다.


1944년 작가는 삐삐의 원고를 어느 출판사에 보내면서 원고 끝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청소년 담당 관청에 고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은 무조건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는 당시의 분위기에 저자는 삐삐를 통해서 저항하였다. 그 결과 그녀의 작품은 85개 언어로 번역됐고, 전 세계적으로 1억 3천만 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작가인 린드그렌이 지난 2002년 1월 28일 1941년부터 살던 집에서 향년 94세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을 때 수많은 스웨덴 사람들이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무민은 북유럽 전설 속 생물체인 <트롤>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1945년 핀란드 동화작가 토베 얀손에 의해 탄생했다. 흰 피부에 둥글고 귀여운 생김새의 무민이 나왔을 때 이 캐릭터가 훗날 세계인의 환호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얀손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스톡홀름과 헬싱키의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화가와 정치풍자 만화가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전쟁과 내전으로 핀란드 경제가 피폐해지자 얀손은 생계를 위해 정통 회화보다 일러스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먹물 기계>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그녀는 고달픈 나날을 보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고달픔이 무민 시리즈가 40년을 지속한 원동력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자신을 북돋우기 위해서 그녀는 계속해서 동화를 썼으며 전쟁이 끝난 1945년에 출간된 <아빠 무민의 모험>이 큰 인기를 끌면서 무민 시리즈는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26년 동안 총 8개의 무민 동화를 썼다.


1953년에는 영국 신문 <이브닝 뉴스>에 무민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무려 22년간이나 게재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힘입어 그녀는 전 세계 40개국의 신문에도 무민 만화를 연재하였으며 이후 TV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1990년에는 무민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방영되었다.


무민 시리즈의 시작은  <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부터이다. 동화는 무민 가족이 등대가 있는 섬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홍수를 극복하고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너무 밋밋해 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과 스스로 생각하는 힘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들여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한다. 무민 시리즈에 나오는 대사 중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 기억되는 구절은 다움과 같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내일 따위는 걱정하지 말아요.

자, 지금부터 보물을 찾으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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