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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Nov 27. 2020

아야 소피아

제국의 심장

터키의 90퍼센트는 이스탄불이라고 말한다. 로마와 비잔틴 그리고 오스만 튀르크 등 세계 역사를 주름잡았던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은 그 자체가 인류의 역사이다.


아야 소피아와 톱카피 궁전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대표되는 이스탄불의 유적은 동서 갈등과 화합의 역사가 빚어낸 최고의 인류 박물관이다. 특히 기독교의 성당인 아야 소피아와 이슬람교의 사원인 블루모스크는 천 년의 시차를 두고 마주하고 있어 이 곳에 서면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역사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묘한 감동에 휩싸인다.



우리와 형제의 나라라라고 불리는 터키의 역사는 그리스 출신인 비자스라는 인물이 지금의 이스탄불에 비잔티움이라는 도시를 건립하면서 시작한다. 비잔티움은 곧 로마에 복속되었고 서기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고 동로마 제국을 선포하지만 불과 7년 후인 337년에 죽음을 맞는다.


그 뒤를 이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부터 비잔티움은 아야 소피아를 비롯하여 수많은 건축물이 지었으며 이후 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기독교의 시대를 맞이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자 술탄 마호메트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를 죽이고 이 곳을 정복하자 수도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이름을 바꾸고 톱카피 궁전과 이슬람 사원 등을 지으며 신생 제국의 위상을 떨친다.


그로부터 400년이 흘러 19세기가 되자 오스만 제국의 쇠락이 시작되고 1차 대전 이후로 국부로 불리는 아라 튀르크가 앙카라를 중심으로 국가 재건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터키 공화국을 창건하여 오스만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을 가진 아야 소피아 성당은 서기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 때 건축되었으며 532년의 대화재로 소실된 부분을 537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재건하였다. 당시 15층 높이의 돔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아야 소피아를 본 황제는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에게 이겼도다.



1453년 콘스탄티누스 11세 때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이 곳을 점령한 후 이슬람의 모스크로 개조되었으며 사원 주위에 보이는 첨탑인 미나레가 이때 건립되었다. 이후 터키 공화국이 선포된 1934년부터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라는 그리스도교의 우주관이 드러나도록 네모난 건물 위에 20미터 높이의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을 얹은 아야 소피아는 엄청난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기둥 없이 30미터의 대형 아치 네 개가 돔을 바치는 식으로 건설되었다. 그 특이한 양식으로 아야 소피아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로마의 콜로세움 그리고 중국의 만리장성 등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아야 소피아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황제의 문 위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축복을 받은 레오 6세가 보인다. 예수가 들고 있는 성경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할지니  
나는 온 세상의 빛이다.



황제의 문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면 중앙 돔 아래로 이슬람 문자가 새겨진 커다란 아랍어 동판이 보인다.



이는 알라와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롯한 초대 칼리프의 이름으로, 칼리프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말한다. 이슬람은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지는데 선출로 후계자를 뽑는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선출된 아부 바르크와 오마르 그리고 오스만, 알리를 모두 인정한다. 이에 반해 혈통 승계를 주장하는 시아파는 무함마드와 그이 사촌 동생인 알리 그리고 그 아들들인 하산과 후세인만을 후계자로 인정한다.


그런데 수니파의 핵심 제국인 오스만 왕정이 지은 모스크에 시아파의 하산과 후세인의 동판이 있는 것을 보면 종파를 초월한 오스만 제국의 통합 정책을 엿볼 수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 제일 안쪽에 보이는 미흐랍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메카의 방향에 맞추어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다. 메카는 이슬람교가 태동한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도시를 말한다.



미흐랍 오른쪽에는 이슬람의 금요일 예배를 위한 설교단인 민바르가 있고 그 옆에 술탄이 앉은 이층으로 된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미흐랍위 본 당 천장에는 성모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훼손된 미카엘 천사의 흔적이 보인다. 성 소피아 성당을 처음 손에 넣은 마호메트 2세는 성당에 새겨진 성화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성화의 보호를 위해 처음에는 하얀 천으로 가렸으며 이슬람교의 세력이 최절정이었을 때는 성화를 회칠로 가렸다. 1923년 오스만 왕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을 창건한 아라 튀르크 대통령은 1935년 아야 소피아를 성당도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당의 복원작업이 시작되면서 회칠로 덮여 있던 비잔틴 시대의 성모와 예수 등의 황금빛 모자이크들이 되살아났다.


나와 다른 가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그들을 존중하는 오스만 제국의 마호메트 2세로 인하여 오늘날 유물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아야 소피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본당의 불빛을 받아 찬연히 빛나는 천장의 성모와 아기 예수는 황금빛을 배경으로 인자하게 앉아 있다. 인자한 성모의 손이 무릎을 드러낸 아기 예수의 오른쪽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모자이크화를 자세히 보면 원근법이 보인다. 이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서 시작된 유럽의 원근법이 11세기 비잔틴 제국의 기본 회화기법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아야 소피아 내부에 있는 91개의 채광창은 자연광을 이용해 벽화를 부각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 1층에는 이 외에 고대 페르가몬에서 가져온 1250리터의 물을 담을 수 있는 대리석 항아리와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완전히 한 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실이 담긴 땀 흘리는 기둥이 있다.


이제 2층으로 올라가자. 2층으로 통하는 황제의 길은 계단 대신 비스듬한 경사로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시종들이 가마를 어깨에 메고 오를 때 흔들림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2층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데이시스 모자이크>이다. 간청, 탄원이라는 뜻을 지닌 <데이시스의 모자이크>는 그리스도에게 죄인을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261년에 제작한 것으로 빛이 항상 등장인물의 오른쪽으로 들어오게 제작하여 수심이 가득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한의 얼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데이시스 모자이크 맞은편에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제4차 십자군의 베네치아 사령관이었던 엔리코 단돌로는 이슬람 세력이 아닌 같은 기독교 세력을 공격해, 기독교가 동서 교회로 완전히 갈라지게 만든 인물이다. 800년이 흐른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이 사건에 대해 두 번이나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단돌로의 무덤은 영광은 영광, 아픔은 아픔 그대로 역사를 기억하고 간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람을 마친 후 나갈 때 1층 출구의 천장 뒤편에는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이 있는데 오른쪽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이고 왼쪽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다. 출구 앞에 커다란 거울을 갖다 놓아 작품 감상을 돕고 있다.


처음 916년 동안은 교회로 이후 481년 동안은 모스크로 존재한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문화 위에 이슬람 문화를 입힌 곳으로 이슬람 문화 위에 기독교 문화를 입힌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과 함께 대립과 통합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세계 최고의 역사적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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