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모든 일은 돈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부부가 이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많이 못 버는 남편 때문이고 자식이 부모를 무시하는 이유는 인격보다는 돈이 없어서이다. 부모들은 죽기 전까지 자식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면 안 된다고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유산을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은 자식들은 서로 시기하고 미워한다. 친구관계 역시 돈을 빌리고 안 갚으면 아무리 친해도 절교한다. 돈 앞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없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누어지며 그것은 학벌이나 인물 그리고 인격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고 그는 그의 좁은 방에서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돈 밖에 모르는 욕심 많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그 돈으로 자신의 가난함을 벗어날 뿐 아니라 주위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두려워서 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지만 자신과 같은 초인은 얼마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가슴에 도끼를 품고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며 노파를 죽이는 것은 사회정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고 그로 인해 생기는 돈은 모든 사회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강변에 있는 노파 집에 다다르자 엄청난 긴장감과 부담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정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그 정도의 감정은 억누를 수가 있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도끼로 노파를 죽였다.
그리고 돈을 챙겨서 나오려는데 평소 노파로부터 무시를 받던 노파의 착한 동생이 처참한 언니의 시신을 발견하고 비명을 자르자 그는 그녀마저 도끼로 내리쳐 죽인다. 그는 그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그가 하려는 일은 노파의 동생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하는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녀마저 살인하자 스스로의 정당성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파로부터 훔쳐온 돈이 역겨워 땅에 파 묻었다.
살인 이후 그는 연일 술을 마시고 그가 좋아하는 도박을 했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늘 괴로웠다. 그는 고독했으며 돈으로 인한 자유는 없었다. 우울한 얼굴에 한순간의 미소나 기쁨도 없었다. 결국 그는 살인으로 정의와 자유를 모두 잃었으며 하루하루 지옥 같은 생활을 보냈다. 그때서야 지옥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어떤 희망도 기쁨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는 그를 유일하게 위로해주는 여인은 창녀 소냐 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의 집에서 그의 죄를 고백하자 그녀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를 안아준다. 그리고 그에게 더러운 피로 물든 도시의 광장으로 나아가 그 땅에 키스를 하며 용서를 구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센나가 광장으로 가서 키스를 한 후 자수를 하고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소냐와 함께 시베리아로 가서 형벌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소냐와 함께하는 시베리아의 유배 생활은 힘들기보다는 그에게 억만년 보다 긴 지옥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몸은 구속되어 있었지만 소냐와의 사랑이 있어 기에 처음으로 그는 웃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결국 시베리아의 생활은 그에게 사랑과 기쁨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천국이 되었다.
이상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줄거리이다. 그리고 사진들은 소설 속 실제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노파의 전당포 그리고 소냐의 집이며 코쿠시킨 다리와 센나야 광장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아버지가 의사로 재직한 빈민 병원의 한 사택에서 태어났다. 세 형제와 네 자매 중 둘째였던 그는 열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성인이 되자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취직이 보장되는 육군 공병학교에 입학해 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절 대부분의 러시아 젊은이들은 나콜라이 1세의 억압통치에 저항하며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던 사회주의를 꿈꾸는 시기였다.
1849년 3월,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2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얼마 후 동지들과 함께 사형대에 올랐다. 당시의 사형은 총살이었는데 사형수들을 향해 총을 쏘려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황제의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 사형 집행을 중시시켰던 것이다. 이후 그는 4년 징역과 종신 병역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를 향해 떠났다. 시베리아의 생활은 혹독했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책은 성경 한 권뿐이었다.
힘든 수형생활을 마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은 스물아홉이던 1859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형과 함께 잡지를 발간했고 그 잡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1846년, 4월에 아내 마리아가 죽고, 6월에는 형 미하일이 죽었다. 12월에는 친구 아폴론과 그리고리예프가 죽었다. 잡지는 정치상의 이유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빚이 1만 5000 루블에 달해 있었으며 그는 간질을 앓았다.
당시 그는 지옥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글을 써야 했다. 병세는 악화되고 채권자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그에게 유일한 돈벌이 수단은 전업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드라마틱한 재미를 주는 글을 써야 했기에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과 살인 그리고 남녀관계를 소재로 글을 쓰야만 했다. 그런 지독한 역경을 뚫고 나온 명작이 1865년부터 1866년에 걸쳐 잡지에 연재된 <죄와 벌>이었다. 그리고 그 책이 그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당시 그는 <죄와 벌>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비적인 방탕한 생활에 의해 빚에 쪼들려 있었다. 한 빚쟁이가 그에게 정한 날짜까지 일정한 양의 원고를 제공하지 못할 경우 앞으로 그가 쓰게 될 모든 책의 판권을 요구했다. 그는 서명했지만 글을 쓰지 않았으며 정해진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자 이를 보다 못한 친구가 속기사를 고용하여 작품을 구술하자는 묘안을 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안나라는 젊은 속기사를 고용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구술한 원고로 위기를 넘긴 그는 스무 살 차이의 안나와 재혼했다. 안나는 남편의 모든 번잡한 일상사를 능숙하게 처리했고, 간혹 발발하는 남편의 간질은 물론 심각한 도박벽과 불안정한 생활까지를 잘 관리해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에 힘입어 도스토예프스키는 1880년 그의 필생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하였다. 소설의 성서라고 불리는 그 책은 2부로 구상되었는데 그때 발표한 것은 1부였다. 그러나 그에게 2부를 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881년 1월 20일 이른 아침 도스토예프스키는 병석에 누워 그는 아내에게 시베리아에서 수형생활 중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성경책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무 곳이나 펼쳤는데 그곳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지금은 용서하라.
도스토예프스키가 세상을 떠난 상트페테르부르크 쿠즈네치느이 길 5번지 아파트의 살림집은 지금 박물관이 되어 방문객을 맞고 있다.
아파트 박물관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금빛 돔을 가진 블라디미르 성당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족이 다니던 성당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숨을 거두기 전에 받은 종부 성사도 이 성당의 사제가 와서 했다. 성당 가까운 곳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박물관이 들어 있는 아파트 건물은 지은 지 2백 년이나 되었지만 새단장으로 깨끗해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아파트 2층에서 살았다.
건물 2층의 창문과 창문 사이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는 석판이 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가 이곳에서 1846년에, 또 1878년부터 1881년 2월 9일까지 살았다. 여기에서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다
박물관은 도스토예프스키 가족이 살던 2층의 살림집과 그의 사후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들인 추가 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가 전시 공간에는 주로 사진과 그림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살림집 공간으로 들어가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쓰던 모자와 우산 등이 전시되어 있는 입구가 나오고 당시 아내 안나의 살림 메모와 주판 그리고 속기 노트 등이 전시되어 있는 안나의 방과 식당이 나온다. 그리고 식당 옆 거실에는 타원형의 노란색 담배 박스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생전에 쓰던 것이다. 여기에 딸 류보피가 도스토옙스키 사망 직후 쓴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아빠가 죽었다. 1881년 밤 8시 45분에
하지만 실제 공식적으로 죽은 시각은 8시 38분이다. 그래서 거실 옆의 서재 안 시계는 8시 38분에 맞춰져 있다.
서재는 맨 안쪽에 소파가 있고 그 앞에 책상이 창문을 마주하고 놓여있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촛대가 세워져 있다. 소파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침대이기도 했다. 푸시킨처럼 도스토예프스키도 소파에서 숨을 거뒀다.
이제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나와서 네프스키 수도원에 있는 그의 무덤으로 가보자.
네프스키 수도원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하여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 등 러시아의 예술가와 작곡가 그리고 사상가들이 나란히 묻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무덤 앞에 서자 평생 돈과 인간의 심리 문제를 다루었던 그의 작품과 그의 일생이 하나씩 떠 오른다. 그리고 지옥은 죄를 지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이 저승의 세상이 아니라 돈 때문에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현재의 상태를 말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되새겨본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위의 사람과의 관계와 사랑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온다는 그의 말이 무덤 아래에 놓인 꽃처럼 비장하면서도 아름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