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도로는 도심 중앙을 가르는 네프스키 도로로 향한다. 13세기 몽고군의 침략을 막아내며 러시아를 구원한 알렉산드르 네브스키를 기념해 만들어진 이 대로는 모스크바 역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이르는 4km에 이르는 도로로 도로변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줄지어 있다.
아침 산책을 하듯 여유롭게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궁전 광장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오늘의 첫 방문자인 <푸시킨 박물관>이 나온다.
1834년 모스크바에서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물구하고 13살 연하의 나탈리야와 결혼한 푸시킨은 이곳 상트페트르부루크로 왔다. 다행히 이곳의 처음 생활은 자식들을 4명이나 낳으며 평화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푸시킨이 걱정했던 일들이 하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젊고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아내의 바람기와 추문이었다.
푸시킨의 집은 황제의 겨울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반지하층을 포함해 4층짜리 노란색 아파트 건물로 앞으로는 운하가 흐르고 있다.
푸시킨의 집이 황제의 궁전과 가까이에 있었던 이유는 그가 1834년부터 황실의 침소 부시종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인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가 궁정 무도회에 자주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비판하는 푸시킨을 관직에 앉혔다. 또한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야 역시 남편의 작품 활동 같은 데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궁정의 무도회 등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푸시킨은 당시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침소 부시종장은 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직책이지만, 황실은 나탈리야가 궁전에서 춤추기를 원한다.
이후 그녀가 황제와의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 때까지만 해도 푸시킨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반역 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날조한 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36년 11월 그의 아내 곤차로바가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자 그는 참지 못한다.
푸시킨은 당시 아내와 불륜 소식을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이 프랑스인 근위대 장교 조르주 당테스리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에게 결투 신청을 한다. 하지만 갑자기 당테스와 처제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결투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곤차로바와 당테스를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고 이에 분개한 푸시킨은 결국 당테스와 결투 신청을 하고 당테스는 이를 받아들인다.
푸시킨의 집을 나와 나와 네브스키 대로로 나가면 대로변에 <문학카페>가 나온다. 당시의 이름은 <볼프와 배란쥐>로 평소에 푸쉬킨은 이 곳에 자주 들러 음료와 디저트를 즐겼다. 푸시킨은 죽음의 결투를 앞두고 이곳에서 레몬 네이드를 시켜 먹으며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당시 그가 앉았던 자리는 그의 밀랍인형과 함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추운 겨울 푸시킨이 결투 장소에 도착했지만 아내는 보이지 않았고 결투를 진행할 입회인과 당테스만이 보였다. 그들은 총을 들고 열 걸음을 걸은 뒤 총을 쏘았는데 푸시킨은 기병장교의 민첩함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푸시킨은 복부 총상을 입고 집으로 옮겨졌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그의 집에는 그가 실제로 결투에 사용한 총과 그가 사용했던 서가 그리고 그가 죽어가면서 누워있었던 서가의 소파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서재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 방에는 푸시킨 아내의 침대가 보인다. 남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지만 죽어가는 남편을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았으며, 대다수 사람들이 남편이 죽은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비난에 자존심이 상한 아내는 남편의 서재 옆에 방에서 숨죽인 채 남편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신의 경솔한 행동으로 가족에게 큰 상처를 준 남편의 신음소리와 그 신음 소리조차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하는 아내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가고 임종의 순간이 왔다. 마지막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느냐는 질문에 푸시킨은 아내와 2살과 4살 된 자식들을 불러서 한 명씩 안아주었다. 그리고 서재의 책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눈을 감았다.
안녕
37살의 나이로 푸시킨이 사망하자 2만 명의 이상의 문상 인파가 몰려들었다. 레르몬토프는 푸시킨이 이런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된 것은 러시아 궁정의 시시한 무리들의 함정과 음모 때문이라고 분노했다. 조문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놀란 가슴으로 6만의 군대로 경계를 세웠으며 푸시킨의 관을 미하일로프스코예 인근의 수도원으로 급히 옮기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푸시킨의 사망 후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고골은 푸시킨을 200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한 작가로 균형된 정신세계를 가진 위대한 인간이 죽었다며 몹시 애석해했다. 푸시킨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적었다.
나는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리라.
그 이유는
리라로 선량한 감정을 일깨웠고
나의 잔혹한 시대에 자유를 외쳤고
쓰러진 이들에게 동정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푸시킨은 살아생전 늘 겸손했다. 그는 늘 인내와 사랑 그리고 순수의 정신이 자신의 가슴속에 살아있도록 기도했으며 또한 그의 삶이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데 바쳐지기를 바랬다. 그 결과 그는 지역과 세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것 그리움이 되리니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시는 우리에게 우울하고 슬픈 현실을 견디면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며 이후에 그 아픈 시간마저 추억과 그리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삶은 가까이서 보면 고통과 번민의 연속이지만 멀리서 보면 선물같은 것이라고 노래한다.
푸시킨의 위대함은 그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과 함께 군더더가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그의 시에 있다.이는 근대 러시아 문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현재까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러시아 작가가 없기에 그를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푸시킨 박물관을 나와 네프스키 대로로 이동하면 어다서나 눈에 띄는 카잔 성당이 있다.
길게 늘어선 회랑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웅장한 카잔 성당은 파밸 1세의 명령에 따라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을 모방해 건축했지만 오작 러시아 사람의 힘으로 러시아 건축자재를 사용해 지었다고 한다.
카잔 성당은 러시아에서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고 믿어지는 <카잔의 성모 이콘>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그런데 준공 후 바로 일어난 1812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하며 <카잔의 성모 이콘>은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카잔 성당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성당인 이삭성당이 나온다.
황금빛 돔 모양의 지붕이 불쑥 솟아있는 이삭 성당은 높이 101,1m, 길이 111.2m, 너비 97m에 이르는 거대한 성당으로 1818년에 공사를 시작되어 1858년에 완공되었다. 늪지대였던 이곳에 거대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40년 동안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특히 성당 지하에 2만 4천 여 개의 말뚝을 박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과 석회암을 깔아 기초를 다져서 완성했다고 한다. 현재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그리고 세비야의 대성당 이어 유럽의 4대 성당으로 꼽힌다.
100킬로그램의 금을 녹여 칠한 황금빛 돔과 125톤의 붉은색 화강암 원주 기둥으로 외관을 이루는 성당의 북쪽 입구 위에는 그리스도 부활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고 서쪽 입구 위에는 황제에게 축복의 기도를 내리는 성 이삭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칼 브률로프가 그린 <동정녀 마리아>와 <최후의 심판>을 감상할 수 있다. 성당의 화려한 실내를 둘러보았다면 별도의 티켓을 구입해 262개의 계단을 따라 돔에 오르면 멋진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제 밤이 어두워지면 유람선을 탈 시간이다.
유람선을 타고 황금 빛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를 누비다가 네바강으로 나가면 이곳의 랜드마크인 궁전다리가 밸트를 풀고 우뚯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페트로 파플로스키 성당이 그 우아한 자태로 여행자의 마음을 훔치며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