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민주주의 시작
런던 하면 떠오르는 것이 많다. 검은 모자와 빨간 제복을 입은 근위병, 빨간 2층 버스 그리고 빅벤이다. 그중 가장 여행자를 사로잡는 것은 빅벤이다. 파리를 방문한 여행자가 에펠탑을 보고 비로소 파리에 왔음을 실감하듯 런던 지하철역을 나서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빅벤을 보면서 런던 여행의 전율을 느낀다.
빅벤이 있는 국회의사당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런던 브리지를 건너 국회의사당 맞은편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 서면 템즈강 위로 장엄하게 펼쳐진 국회의사당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빅벤이 있는 시계탑은 하원을 상징하고 반대편에 있는 빅토리아 탑은 상원을 상징한다.
빅벤은 <큰 종>이라는 뜻으로 <크다>의 빅과 시계탑의 설계자였던 벤자민의 앞 글자에서 유래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폭격에도 살아남아 영국인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95m의 빅벤은 아직도 손으로 태엽을 감는 전문적인 시간지기가 있으며 꼭대기 조그만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의회 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국회의사당은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의회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심어 놓은 런던 국회의사당은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일부였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이 곳뿐만 아니라 런던 전체가 파괴되었다.
세계 대전 후 런던은 도시 복구와 더불어 인구집중으로 인한 새로운 도시 건설에 있어서 파리와는 달랐다. 당시 파리는 구도심을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신도시인 <라데팡스>를 도시 한쪽으로 집중하여 지었다. 하지만 런던은 국회의사당이나 타워브리지 같이 새로운 건물을 도심 중앙에 짓는 대신 기존의 도시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장식하였다. 이로 인해 런던은 역사적 건물과 현대적 건물이 공존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다.
국회의사당 정문을 지나면 의사당 앞마당에 올리버 크롬웰 동상이 있다. 동상은 길 건너 세인트 마가렛 교회의 뒷문에 있는 찰스 1세의 흉상과 서로 마주 보며 영국 민주주의를 역사를 보여준다.
절대주의 왕권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1215년.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를 승인한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는 사라졌다. 민주주의 기본이 되는 <마그나카르타>에는 영주와 주교 그리고 귀족의 동의가 있어야만 왕이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규정을 준수했는지 고위 귀족회의가 감시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회의는 둘로 나뉜 영국식 의회로 자리 잡았다.
고위 귀족과 주교는 <상원>에, 시골의 기사와 시민은 <하원>에 속했다. 마그나 카르타 이후 17세기 초까지 모든 왕은 의회와 협력해야 한다는 규정을 제임스 1세가 등장하기까지 400년 동안 대체적으로 잘 지켜왔다.
1603년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계자 없이 죽음을 맞이하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모든 왕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된다고 왕권신수설을 믿으며 절대 왕정의 시대를 펼쳤다. 하지만 그는 계속된 전쟁의 실패로 국익을 창출하지 못하였으며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신교 세력의 탄압에 앞장섰다.
그 과정에서 찰스 1세는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는 반발했다. 의회는 강제로 세금을 거두는 것을 제한하며 국민의 각종 자유권을 보장하는 <권리청원>을 요구했다. 찰스 2세가 이를 수용하는 듯했지만 재정문제가 풀리지 않자 1625년 찰스 1세는 돌변했다. 그는 신에게 선택받은 지배자는 자기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의회와 대립했다.
왕과 의회의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지고 의회 편 군대는 급진적 청교도이자 자신을 <신의 전사>라 칭하는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했다. 두 차례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둔 크롬웰은 왕을 재판에 회부해 사형선고를 내렸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런던의 궁전 앞에서 참수됐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봉기가 왕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었다. 그 후 영국은 크롬웰을 정부수반으로 하는 공화정을 선포했지만 얼마 못 가 그도 과거의 왕과 마찬가지로 의회와 국민의 권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653년 그는 종신 <호국경> 자리에 올랐고, 군대를 이용해 독재자처럼 나라를 다스렸다. 크롬웰은 더 나아가 국왕의 자리를 넘보았으나 1658년에 병사하였다. 사인은 인플루엔자였다. 크롬웰의 사후 호국경으로서 권력은 그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넘어가지만 크롬웰식 공화정에 염증을 느낀 국민은 다시 왕을 원해 1660년에 찰스 2세를 국왕으로 맞이한다.
1660년 왕이 된 찰스 2세는 의회의 권리를 지키겠다고 맹세했지만 그 역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추구했다. 하지만 의회의 압력에 의해 찰스 2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쳤고 윌리엄과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권리장전>에 서명했다. <권리장전>은 영국 의회와 시민에게 기본권을 보장하며 법원의 판결 없이는 누구도 처형하거나 감금할 수 없게 했다. 1689년 당시 이런 기본권의 확정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유럽 대륙에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루이 14세의 모델에 따라 절대 왕정을 펼치던 시기, 영국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리와 지도력 역할을 쟁취했다. 그것이 우리가 현재 누리는 민주주의의 단초가 되었다. 사전 예약에 한해서 이루어지는 런던 국회의사당 투어는 웨스트민스터 홀부터 시작한다.
웨스터민스트 홀은 지난 천 년 동안 처음에는 법정으로 사용하였으나 이후로는 새 군주를 위한 호화로운 대관식과 장례식 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넬슨 만델라와 버락 오바마와 같은 중요한 방문객의 접견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곳이 상원과 하원의 의원들이 모여서 함께 연설을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곳은 여왕이 국회 개회식을 위해 방문할 때 사용하는 장소로 벽 중앙에 금색과 보라색 벨벳의 웅장한 왕좌가 중심에 보인다. 왕좌 아래에는 키가 작은 여왕이 발이 바닥에 매달려 있는 방지하기 위한 발판이 보인다.
다음은 로열 갤러리가 나온다.
국회의사당에서 가장 큰 방 중 하나로 트라팔가와 워털루 전투와 같이 영국의 위대한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여주는 대형 그림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다른 쪽 벽에는 헨리 8세와 그의 모든 아내를 포함하여 28명의 튜더 군주의 그림으로 덮여 있다.
다음은 가장 화려한 상원이 나온다.
깊은 금색과 밝은 빨간색으로 가득한 이 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과 벤치 위의 프레스코 화이다. 방 중앙에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여왕이 앉는 화려한 왕좌와 상원 의장이 앉는 커다란 빨간 쿠션 인 울 자크가 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시 양모 무역이 국가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모든 중요 인물은 양모 베일 위에 앉아야 한다고 결정한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다음은 팔각형 중앙로비가 나온다.
중앙 로비인 이 곳은 상원과 하원 사이의 교차로이며 모든 문이 열려 있다. 그래서 한쪽 끝의 왕좌에서 다른 쪽의 의장 의자까지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국민들이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있을 경우 현지 의원이 와서 로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로비에는 20세기 이후의 총리 동상이 늘어서 있는 게 윈스턴 처칠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원을 방문한다.
상원에 비해 상당히 단순하고 차분해 보이는 이곳은 블리츠의 폭탄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950년대에 재건되었다. 재건 당시 이 방을 디자인 한 사람은 워털루 다리와 런던 특유의 빨간 전화박스를 디자인한 건축가 길버트 스코트에 의해 지어졌다. 홀 안에 놓여 았는 녹색 벤치는 의원의 3 분의 2정도만 앉을 수 있어서 바쁜 회기 중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의장의 의자는 방 끝에 있으며 양쪽의 자리는 여야 의원들이 나누어서 앉는다.
국회의사당을 나오면 웨스터 민스터 사원이 보이고 템즈강 건너편에는 런던 아이가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영국의 수도 런던은 민주주의 산실인 동시에 왕조시대의 전통과 함께 현대적인 건물로 재미와 낭만을 고루 갖춘 유럽 여행의 관문으로전 세계여행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새뮤얼 존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 싫증난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