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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Oct 13. 2020

카이사르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7세기 로마 건국의 초대 왕이었던 로물루스는 왕국을 만드는데 필요한 인구를 늘이려는 계획으로 이웃 사비니 남자들을 축제에 초대한다.


축제가 절정에 이르자 로물루스는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하고 사비니 남자들을 쫓아낸다. 3년 후 사비니 남자들은 힘을 길러 자신들의 여동생과 딸을 찾기 위해 로마에 쳐들어왔으나 그들을 막고 선 사람들은 바로 사비니의 여인들이었다. 이미 그녀들은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 있었으며 로마인의 피가 흐르는 자식도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 75번 방에 있는 <사비니 여인의 중재>에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양쪽 군인들 사이에 선 여인은 헤르실리아로 그녀는 그녀 왼쪽에 보이는 사비니군의 최고 지휘자인 타티우스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오른쪽에 보이는 로마 왕 로물루스의 아내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애원하고 있다.


로물루스는 로마라는 글자 위에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쌍둥이를 그린 방패를 들고 있다. 중앙에 있는 헤르실리아 밑으로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걱정이 가득한 여인들이 보인다. 그리고 가장 오른쪽 기수는 전쟁을 중지하려는 듯 말의 말머리를 돌리고 있다. 사비니 여인들의 필사적인 중재로 양측은 전쟁을 중단하고 공동통치를 시작한다.


로마 건국의 역사는 트로이 전쟁부터 시작한다. 트로이의 왕족인 안키세스와 여신 비너스의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난 아이아네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전쟁에서 패배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트로이가 함락되는 날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탈출한다. 그리고 긴 세월을 유랑한 뒤 이탈리아에 도착해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이후 아이아네스의 아들인 아스카니우스가 성장하자 그는 북쪽으로 이동해 로마 남동쪽 24km 지점에 알바 롱가 왕국을 세운다.


알바 롱가의 13대 왕 프로카스에게는 왕자가 둘이 있었는데 형 누미토르와 동생 아물리우스이다. 그런데 왕위를 동생인 아물리우스가 차지한다. 부당하게 왕위를 빼앗은 동생은 후사를 없애기 위해 형을 쫓아내고 형의 아들을 죽인다. 또한 형의 딸인 실비아를 불을 지키는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로 만드는데 당시 여사제는 신성한 존재로 결혼을 할 수 없었고 자식 또한 가질 수 없었다.


어느 날 실비아가 제사 도구를 씻기 위해 강으로 갔다가 달콤한 잠이 들었다. 이때 전쟁의 신 마르스가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져 실비아는 쌍둥이 형제를 낳는다. 이를 안 아물리우스는 실비아를 사형에 처하고 쌍둥이 형제를 테베르 강에 버리라고 명령한다.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쌍둥이들이 불쌍해서 테베르 강이 흐르는 팔라티노 언덕 기슭에 버린다.




그때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암늑대가 다가와 잔뜩 불은 젖을 아기들에게 물리고 몸에 묻은 진흙을 혀로 핥아 주었다. 이 광경을 우연히 본 양치기가 소리를 치자 암 늑대는 조용히 사라졌다. 이후 양치기가 쌍둥이를 키운다. 청년으로 자란 쌍둥이 형제는 아물리우스 궁전으로 쳐들어가 왕을 죽이고 원수를 갚은 후 알바 롱가의 왕권을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할아버지 누미토르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팔라티노 언덕으로 와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그러나 팔라티노 언덕에 누구를 중심으로 도시를 세울 것인지 쌍둥이 간 다툼을 벌인 끝에 형이 동생을 죽이고 로마를 건국한다. 쌍둥이 형제의 이름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이며 형의 이름에서 로마라는 이름이 시작된다. 기원전 753년에 일어난 일이다.


로마의 1대 왕 로물루스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구를 늘이기 위해 축제를 열고 이웃 에트루리아 지역의 사비니의 여인들을 납치하여 로마 건국의 틀을 다진다.


로마가 성장하자 어느덧 이탈리아 반도에서 할아버지의 나라였던 알바 롱가와 패권을 다투게 되었다. 두 왕국은 전쟁으로 인한 많은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한 가문을 선택하여 결투로 승패를 가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로마의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아들과 알바 롱가의 쿠리아티 가문의 세 아들이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가문은 서로 혼인관계에 있었다. 호라티우스가의 세 아들 중 한 명의 아내는 쿠리아티 가의 딸이었으며, 호라티우스가의 딸은 쿠리아티가 아들과 약혼한 사이였다. 이 비극적인 결투의 결말은 호라티우스가의 한 아들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승리자는 약혼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동생을 보자 실망하고 애국적인 마음에 동생을 단칼에 베고 만다. 이후 법정에 선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변호하여 아들은 면죄부를 받게 된다.




루브르 박물관 75번 방에 전시되어 있는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에서 이 역사적 사실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 작품에서 칼을 건네주고 있는 남자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어른인 아버지이다. 그 칼을 향해 삼 형제는 무쇠처럼 강인한 팔을 뻗고 있다. 결의에 찬 눈과 꽉 다문 입술 그리고 근육질의 팔과 다리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른편 어두운 곳에는 결의에 찬 삼 형제의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들은 마음이 찢어질 듯 슬퍼 보인다. 마음 같아서는 전쟁터로 나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지만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저 울음만 삼킬 뿐이다.




두 번의 전쟁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잡은 로마는 기원전 510년 로마의 5대 왕 타르퀴니우스가 로마 번영의 초석을 쌓는다. 당시 목축업과 농업이 주축 산업이었던 로마는 6개의 언덕 위에 있는 보잘것없는 움막 촌이었다. 그래서 서로의 만남과 물물교환을 위해 언덕을 내려와 교류를 해야 했으나 비가 많이 오면 언덕 아래 평지에 물이 고여 교류가 중단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로마 최초로 선거를 해서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물이 넘쳐나는 포럼 지역에 <클로이카 막시마>라 불리는 하수도시설을 만들어 고인 물을 티베르 강으로 흐르게 하고 그 위로 돌을 깔아 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 위에 신전과 재판소 그리고 의회 등 각종 공공시설이 세웠는데 이것이 포로로마노의 시초가 되었다.




2천5백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하수도시설은 로마가 움막 촌에서 벗어나 기원 후 인구 100만이라는 세계도시로 번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로마가 초기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는 7대 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때문이었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섹스투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안하무인 호색한으로서 친구의 아내인 루크레티아를 겁탈하자 그녀는 자살한다. 이에 분노한 남편과 부르투스등 로마 사람들과 함께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기원전 510년경 왕정을 폐지한 로마는 이후 450년간 공화정치를 펼친다. 초기에 공화정 로마는 귀족들이 통치했다. 그들은 국가 정책을 심의하는 원로원을 만들어 스스로 의원이 되어 모든 법안을 결정하였으며 그들의 대표인 집정관을 뽑아서 행정을 맡겼다. 시간이 흘러 평민들을 대표하는 호민관 제도가 생겨나 귀족 중심의 원로원에서 정한 법을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공화정의 정점은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기원전 270년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한 로마는 지중해로 눈을 돌린다. 당시 지중해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지중해의 무역권을 가지고 로마와 카르타고는 두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로마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한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지중해 해상 무역권을 장악한 로마는 막대한 교역으로 부강해지고 식민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갖은 물자로 풍요로웠다. 하지만 사치와 불법이 극에 달한 공화정 말기에 이르자 로마는 혼란에 빠진다.


당시 로마는 뇌물을 쓰는 사람이 권력을 잡았으며 고리대금업이 성행했으며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차지했다. 또한 귀족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셨으며 오직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는데 몰두하였으며 하층민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자신들의 빚을 탕감해 줄 정치인을 찾았다. 이제 로마의 공화정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란을 잠재워질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의 정치 중심에 두각을 나타내는 정치인이 카이사르였다.


루브르 박물관 1층 중앙홀로 가면 카이사르의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에스파냐에서 총독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집정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서 당시 성공한 군인이었던 폼페이우스와 거부인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펼쳐야 했다.


그는 삼두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곧 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갈리아로 떠났다. 오늘날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해당하는 갈리아에서 그는 2만 4천여 명의 백성을 다스렸다. 또한 카이사르는 7년 동안 갈리아에서 8백 개 도시와 3백여 종족을 정복했으며 라인강 지역의 게르만족까지 점령했다. 모든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의 전쟁 능력이 이전의 살았던 모든 로마 장수들을 능가했다고 평가하였다.


이후 시대를 거쳐간 영웅들은 모두 카이사르가 되고 싶어 했다. 신성 로마 황제와 나폴레옹이 그랬으며 러시아의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는 고유명사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백성들에게 빚을 탕감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원정으로 모든 토지를 빼앗긴 군인들에게 식민지를 나눠주었다. 이후 그는 알렉산더가 되고자 했다. 이미 갈리아와 게르만족을 평정한 그는 파르티아를 정벌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는 꿈을 꾸었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를 정벌하기 위해 떠나기 3일 전 원로원을 소집하고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날 파티에서 좋은 죽음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받고 카이사르는 예기치 않게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이야기했다.




자신감으로 호위병 없이 원로원에 도착한 그는 카이사르의 독재를 우려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서 23번의 칼에 찔려 암살당한다. 암살자들 중에는 그가 사랑했던 양아들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은 양아들을 향한 말이었다.


부르투스 너마저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양아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1대 황제가 되면서 로마의 정치는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변한다. 그리고 로마 13대 황제이자 5 현제 시대의 2번째 황제인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로마는 가장 강대한 제국으로 성장한다.


루브르 박물관 1층 드농관 4번 방을 이동하여 트라야누스 황제의 동상을 감상하자.




트라야누스는 오랫동안 로마 국경을 위협했던 다키아를 정복하였으며 파르티아를 침공해 함락했다. 이후 그는 끊임없는 정복전쟁으로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동을 포함한 로마제국 최고의 영토를 가진 황제가 되었다.


또한 그는 내치에도 뛰어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원형경기장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재건하였으며 복지 펀드 알리멘트를 만들어 실행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부자들에게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로 펀드를 조성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양극화된 로마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출처가 불분명하고 익명으로 신고된 기독교인의 탄압을 중지시켰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후 후대 황제들은 취임식을 할 때 아우구스투스의 행운과 트라야누스의 업적을 이어받아 황제 직을 수행한다고 선서해야 했다.


로마 제국의 저력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업적과 더불어 식민지 출신인 그가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선진화된 로마의 정치 시스템에 있었다. 서기 52년 로마의 식민지인 에스파냐에서 태어난 그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동남아 국가 출신의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는 것과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능력위주의 개방적인 정치문화로 로마는 제국이 되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공을 이룬 로마제국의 또 다른 비결은 비결은 상호 견제의 정치 문화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로마사 논고>에서 로마 제국이 부패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로 평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호민관 제도를 만들어 황제와 원로원에 대항하여 합리적으로 경쟁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였다.


개방성과 상호 견제의 정치문화가 서대한 로마제국을 유지하는 두 가지 축이었다.


이후 황제들과 귀족들이 관직과 재산을 독점하며 견제에 의한 정치 문화가 사라지자 로마는 몰락했다. 그리고 새로운 천년을 지배할 기독교를 중세에 넘겨주며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가 로마로 흘러 들어왔다가 로마를 통해 중세시대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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