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을 천심으로
무장한 수 십 명의 군인을 태운 배가 나아간다. 상대편 배에도 무장을 한 군인들이 선두에 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이윽고 배가 서로 부딪히자 큰 굉음을 내며 뱃머리가 부서지고 그 사이로 난 통로로 칼과 창을 둔 군인들이 서로 넘어가 싸움을 시작한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적의 칼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심장을 향한다.
점점 함성이 커지고 군인들은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죽어 나간다. 태양은 뜨거웠지만 차양막에 가려져 차갑게 식은 피 빛의 물결이 붉게 일렁인다. 기세를 제압하려는 군인들의 함성에 더해 서로 죽이라는 4만 명의 함성이 하늘 높이 퍼진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모의 해전이다.
콜로세움은 모의 해전을 위해서 밖에서 끌어온 물을 3층 높이에서 받아 수로를 통해 2층과 1층 그리고 지하층으로 내려 경기장 지하부터 차곡히 채워 경기장 전체를 바다로 만든다. 물이 차면 전투함들이 떠오르고 전투를 시작한다. 노예나 적의 포로들을 상대편 배에 실어 실제적인 전투를 벌인 해상전투는 당시 로마인들의 최고 오락 거리였다.
로마 지하철 콜로세오역을 나서면 바로 눈 앞에 콜로세움이 우뚝 서 있다. 신호등을 건너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콜로세움의 위용이 제대로 보인다. 서기 72년 베아파시아누스 황제가 짓기 시작한 콜로세움은 서기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성하였다.
서기 68년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네로 황제가 자살하자 군인 황제들이 득세하여 로마는 혼란에 휩싸인다.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로마 원로원은 그의 아들과 함께 유대 지역을 진압하고 있는 베아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지명한다. 로마 최초의 평민 출신인 베아파스아누스 황제는 아들을 전장에 두고 로마로 돌아와서 네로와 군인 황제들이 펼친 폭정에 지친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짓기 시작한다.
베아파시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을 세울 곳으로 네로 황제가 지었던 황금궁전의 정원을 선택했다. 이 곳은 64년 로마 대화재로 불탄 시민들의 집터를 네로가 빼앗아서 지은 황금 궁전의 터로 시민들의 경기장을 지어 다시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경기장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황금궁전에 있었던 35m의 네로 황제의 거대한 황금 동상인 콜로수스를 철거하지 않고 세워 두었다. 이후 이 원형극장은 이를 인용해 콜로세움이라 불렸다.
서기 79년. 콜로세움이 완성되기 1년 전 경기장이 2층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죽었다.
이후 장남 티투스가 황제직을 물려받고 다음 해에 3층까지 완성하였다. 당시 경기장을 짓기 위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였는데 마침 그가 유대를 정복하고 얻은 전리품과 노예 4만 명을 경기장 건설에 투입하여 완성하였다. 콜로세움에서 포로로마노로 가는 입구에 티투스 개선문에 그가 전쟁을 승리하고 전리품을 앞세워 로마로 입성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베아파시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이 기존의 반원형 경기장과는 차별화된 원통형의 거대한 경기장을 짓기로 설계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
먼저 양 옆으로 벽돌을 쌓고 벽돌 사이에 모래와 흙 그리고 시멘트 역할을 하는 사암을 썩은 콘크리트를 집어넣어 가늘면서 튼튼한 벽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벽기둥을 높고 하중을 잘 견디는 아치로 연결하였다. 이로 인해 거대하면서도 2000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경기장을 만들 수 있었다.
높이 84미터인 콜로세움의 외부는 4층으로 반짝거리는 대리석으로 마감하였으며 각 층에는 72개의 아치가 있다. 아치 사이의 기둥은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장식하였으며 아치 안에는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들로 채웠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72개의 문으로 5만 명의 인원이 15분 만에 입장하였다.
콜로세움 내부는 관중석과 중앙 경기장으로 나누어진다. 관중석 1층 중앙에는 황제석이 있어 황제와 가족들이 앉았으며 그 주위로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과 원로원 의원들이 앉았다. 2층은 귀족들과 부유한 평민들의 좌석이 있었으며 3층에는 무료로 입장한 노예와 여성들이 앉았다. 중앙 경기장은 수많은 나무 받침대 위에 나무판을 깔고 모래와 자갈로 덮은 원형의 경기장으로 만들어졌다. 모의 해전을 하는 날이면 무대와 그 아래 있는 나무 받침대를 치우고 지하부터 깊이 6m까지 물을 채웠다.
80년 티투스 황제가 콜로세움을 완성하고 개막행사를 100일간 성대하게 치렀다. 개막행사 중 하나인 맹수 사냥에서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코끼리와 중동의 사자 그리고 게르만족의 곰과 호랑이 등 5,000마리가 넘는 진귀한 맹수들이 희생되었다. 이는 로마제국의 번영과 힘을 보여주며 로마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주었다.
콜로세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는 검투사의 경기였다. 검투사는 주로 노예들이 맡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적인 검투사들이 양성되었다. 검투사들은 오늘날 아이돌만큼 인기를 누렸는데 그들이 흘린 땀으로 향수를 만들어 팔 정도였다. 경기 후 검투사들은 수익금 일부를 나눠 가졌는데 초보자의 경우도 관리가 받는 돈의 3배를 받았다.
콜로세움이 4층까지 완성된 것은 티투스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이다. 2년 만에 티투스가 죽고 황제가 된 동생 도미티아누스는 4층으로 된 관람석을 만들어 4만 5천 개의 좌석과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석을 갖추었으며 최대 8만 명까지 입장이 가능하게 확장했다.
또한 뜨거운 햇빛에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직물로 만든 벨라리움이란 천막 지붕을 설치했다. 특히 그는 기존의 경기장 아래에 검투사들과 노예들이 대기하는 방을 만들고 수동형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경기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심지어 야간에 횃불을 피워 스릴 넘치는 야간경기까지 실시했다.
역대 황제들이 이렇게 콜로세움에 신경을 쓴 것은 로마 시민들과 황제가 직접 소통하는 정치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경기 후 진 검투사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시민들의 검지에 따른 의견으로 황제는 그 결정에 따르면서 시민들과 하나가 되었다. 이후 콜로세움은 세월이 흐르면서 경기가 점점 더 잔인해지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검투사 시합을 금지하려고 했지만 시민들의 열광을 황제가 막을 수 없었다. 원형경기장은 황제와 귀족 그리고 평민까지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평등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시민에게만 평등했을 뿐이었다. 관중석 밑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다 죽는 이는 대부분 로마제국에 저항하던 적국의 군인들이었고 동물 또한 로마가 확장한 식민지의 야생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잡혀온 생명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잔혹한 사냥 경기에서 공범 내지는 공조자였다.
정오에 열리는 처형식에서도 로마 시민은 고통 없이 단칼에 처형된 반면 비 시민은 야생 동물에 물어 뜯기거나 십자가형으로 천천히 죽어갔다. 생명의 위계에서 동물은 최하위에 있었다. 살아남은 동물은 지하 우리로 돌아갔지만 고통이 연장된 것일 뿐 죽을 때까지 경기에 나가야 했다.
40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검투사 시합을 폐지하면서 콜로세움은 문을 닫았다. 이후 지진의 피해와 르네상스 시대에 궁전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재료를 가져 다 쓰는 바람에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며 채석장으로 전락하였다.
콜로세움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순교한 성지로 여겨졌기에 성 베드로 성당과 같은 기독교 성전을 새로 짓는 데에 성지의 돌을 사용한 것은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1790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콜로세움에 순교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여 이곳에 십자가를 세웠다. 콜로세움이 봉헌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마지막 한마디 <황제는 누워서 죽을 수 없다>는 말처럼 뼈대만 남았지만 2천 년 세월 동안 고대 로마의 기상을 웅변하고 있다.
콜로세움을 나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지나면 고대 로마 사람들이 처음 정착하며 로마 건국을 일구어 낸 팔라티노 언덕이 나온다. 이 곳은 전망이 좋아 황제와 귀족들의 거주지로 자리 잡았다.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 소나무 길을 지나면 황제들의 집무 공간인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와 황제들의 거주지였던 도무스 플라비아가 나온다. 황제 집무실로 사용한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의 최고 볼거리는 궁전의 정원이자 경기장으로 쓰였던 스타디움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만든 이 스타디움은 땅을 넓고 깊게 파서 사방이 땅으로 둘러싸인 경기장으로 황제의 발코니석에서 한눈에 경기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108미터의 경기장 안에는 대리석 기둥들이 도열해 있어 경기가 없는 날이면 황제는 이 곳을 비밀정원으로 사용하였다.
황제의 거주지였던 도무스 플라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안뜰이다. 색색의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안뜰에 서면 생각에 잠긴 채 걸어가는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그는 집무가 끝난 후 팔라티노 언덕의 서쪽 끝에 따로 마련한 집인 도무스 아우구스티로 돌아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화려한 황제의 궁전을 마다하고 소박한 자신의 집에서 살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집 앞으로 커다란 터가 보이는데 이 곳이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목동이 발견한 루페르칼 동굴이다. 여기서부터 로마의 역사가 시작한다.
로마의 건국 신화는 트로이 전쟁부터이다.
트로이의 왕족인 안키세스와 여신 비너스의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난 아이아네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전쟁에서 패배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성이 함락되는 날 그는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탈출한다.
그리고 긴 세월을 유랑한 뒤 이탈리아에 도착해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이후 아이아네스의 아들인 아스카니우스가 성장하자 그는 북쪽으로 이동해 로마 남동쪽 24km 지점에 알바롱가 왕국을 세운다.
알바롱가의 13대 왕 프로카스에게는 왕자가 둘이 있었는데 형 누미토르와 동생 아물리우스이다. 그런데 왕위를 동생인 아물리우스가 차지한다. 부당하게 왕위를 빼앗은 동생은 후사를 없애기 위해 형을 쫓아내고 형의 아들을 죽인다. 또한 형의 딸인 실비아를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로 만들었다. 당시 불을 지키는 베스타 신전의 여사제는 신성한 존재로 결혼을 할 수 없었고 자식 또한 가질 수 없었다.
어느 날 실비아가 제사 도구를 씻기 위해 강으로 갔다가 달콤한 잠이 들었다. 이때 전쟁의 신 마르스가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이로써 실비아는 쌍둥이 형제를 낳는다. 이를 안 알바롱가의 왕 아물리우스는 실비아를 사형에 처하고 쌍둥이 형제를 테베르 강에 버리라고 명령한다.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쌍둥이들이 불쌍해서 테베르 강이 흐르는 팔라티노 언덕 기슭에 버린다.
그때 새끼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암늑대가 다가와 잔뜩 불은 젖을 아기들에게 물리고, 동시에 그들의 몸에 묻은 진흙을 혀로 핥아 주었다. 이 광경을 우연히 본 양치기가 소리를 치자 암 늑대는 조용히 사라졌다.
이후 양치기가 쌍둥이를 키운다. 청년으로 자란 쌍둥이 형제는 아물리우스 궁전으로 쳐들어가 왕을 죽이고 원수를 갚은 후 알바롱가의 왕권을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할아버지 누미토르에게 맡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팔라티노 언덕으로 와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그러나 팔라티노 언덕에 누구를 중심으로 도시를 세울 것인지 쌍둥이 간 다툼을 벌인 끝에 형이 동생을 죽이고 로마를 건국한다. 쌍둥이 형제의 이름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이며 형의 이름에서 로마라는 이름이 시작된다. 기원전 753년에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