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 영웅의 탄생
로마의 1대 왕 로물루스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구를 늘이기 위해 축제를 열고 이웃 에트루리아 지역의 사비니의 남자들을 초청한다. 그리고 그들이 술이 취한 틈을 타서 그들의 여인들을 납치한다. 이후 사비니의 남자들이 힘을 길러 쳐들어오자 이들을 막아선 사람들은 납치되었던 사비니 여인들이었다. 이미 그녀들은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 있었으며 로마인의 피가 흐르는 자식도 있었다.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로 로마와 에트루리아는 화해를 하고 공동 통치를 시작한다.
기원전 510년 로마의 5대 왕 타르퀴니우스는 로마 번영의 초석을 쌓는다. 당시 목축업과 농업이 주축 산업이었던 로마는 6개의 언덕 위에 있는 보잘것없는 움막 촌이었다. 그래서 서로의 만남과 물물교환을 위해 언덕을 내려와 교류를 해야 했으나 비가 많이 내려 물이 고이게 되면 교류가 중단되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로마 최초로 선거를 해서 왕이 된 타르퀴니우스는 지대가 낮아 비만 오면 물이 넘쳐나는 포럼 지역에 <클로이카 막시마>라 불리는 하수도시설을 만들어 고인 물을 티베르 강으로 흐르게 하고 그 위로 돌을 깔아 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 위에 신전과 재판소 그리고 의회 등 각종 공공시설이 세웠는데 이것이 포로로마노의 시초가 되었다. 2천5백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하수도시설은 로마가 움막 촌에서 벗어나 기원 후 인구 100만이라는 세계도시로 번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대 왕으로 노예 출신 세르비우스가 왕에 취임하지만 5대 왕 타르퀴니우스의 아들인 타르퀴니우스가 세르비우스를 죽이고 7대 왕에 오른다. 하지만 타르퀴니우스를 마지막으로 로마는 왕정의 역사를 마감한다.
바로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때문이었다.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섹스투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안하무인 호색한으로서 친구의 아내인 루크레티아를 겁탈하자 그녀는 자살한다. 이에 분노한 남편과 부르투스는 로마 사람들과 함께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기원전 510년경 왕정을 폐지한 로마는 이후 450년간 공화정치를 펼친다. 초기에 공화정 로마는 귀족들이 통치했다. 그들은 국가 정책을 심의하는 원로원을 만들어 스스로 의원이 되어 모든 법안을 결정하였으며 그들의 대표인 집정관을 뽑아서 행정을 맡겼다. 시간이 흘러 평민들을 대표하는 호민관 제도가 생겨나 귀족 중심의 원로원에서 정한 법을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공화정의 정점은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기원전 270년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한 로마는 지중해로 눈을 돌린다. 당시 지중해는 로마보다 한 발 앞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있었다. 지중해의 무역권을 가지고 로마와 카르타고는 두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로마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한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지중해 해상 무역권을 장악한 로마는 막대한 교역으로 부강해지고 식민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갖은 물자로 풍요로웠다. 하지만 사치와 불법이 극에 달한 공화정 말기에 이르자 로마는 혼란에 빠진다.
로마 시민들에게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사람이나 선거 때 뇌물을 쓰는 사람이 권력을 잡았으며 고리대금업이 성행했고 모든 재산의 주인은 급격히 바뀌었다. 노력 없이 권력으로 사람들이 재산을 차지했다.
귀족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을 마셨으며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는데 몰두하였으며 하층민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자신들의 빚을 탕감해 줄 정치인을 찾았다. 공화정이 서서히 몰락하고 혼란을 잠재워질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의 정치 중심에 두각을 나타난 정치인이 카이사르였다.
팔라티노 언덕을 내려와 포로로마노로 향한다.
공화정이 되자 로마의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하여 포로로마노에 웅장한 바실리카를 지었다.
바실리카는 직사각형 건물로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햇빛과 비를 피해 실내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기원전 179년 마케도니아를 제압한 집정관 에밀리아 파울로스는 <바실리카 에밀리아>를 세워 많은 정치인과 사업가가 교류하는 시장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기원전 80년에는 집정관이자 독재자였던 술라는 국립 도서관인 <타불라리움>을 언덕 남쪽에 세웠다.
그리고 기원전 54년에는 카이사르가 <바실리카 율리아>를 지어 법원으로 사용하였다. 이곳 법원에서 민사소송을 담당하던 180명의 변호사들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상대편에게 야유를 퍼붓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 옆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거대한 포룸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을 알리기 위해 원로원 건물을 자신의 포룸 앞에 옮겨와 지었다. 원로원은 오늘날 국회로 건물 가운데 있는 의장 석에는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이 앉았고 좌우에 원로원 석이 있었다. 앞쪽에는 연장자 뒤쪽에는 신참이 앉았던 원로원의 구성은 처음에는 150명이었으나 점차 그 수가 늘어 최대 규모일 때는 600명에 이르렀다. 원로원 앞으로는 신성한 길인 <비아 사크라>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이 개선 행사를 하였다.
<비아 사크라> 끝에는 배 이름에서 가져온 <로스트라>라는 높은 연설단이 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이곳에서 안토니우스는 로마 시민에게 재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이 담긴 카이사르의 유서를 공개하며 추모연설을 하였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황제의 제국으로 바뀌면서 포로로마노의 화려함은 극치에 다다랐다. 당시 로마에는 인구 1백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포로로마노에서 정치인들은 회합과 연설을 하고 판사는 법 집행을 하였으며 사제들은 종교행사를, 시민들은 쇼핑을 즐겼다. 포로 로마노를 나와 조금 걸으면 네로 황제 시대에 순교한 예수의 1대 제자이자 제1대 교황인 베드로가 갇혀 있었던 지하 감옥 마메르티움이 나온다.
베드로는 감옥에서 바닥에 고여 있던 썩은 물 만을 먹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켰다. 이를 본 간수가 그의 신앙심에 감동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이곳에 사도 바울이 갇히기도 하였다. 마메르티움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카이사르가 지은 포룸 율리움이 나온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 한 복판에 기존의 낡은 바실리카를 헐고 자신의 이름을 딴 거대한 바실리카 율리아를 세워 법원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다시 거액을 들여 새로운 바실리카를 세우려 하였으나 포로 로마노 안이 포화상태가 되어 새로운 부지에 건물을 지어야 했다.
그는 캄피돌리오 언덕의 동쪽 부분을 깎아내고 인접한 서민지역인 수부라의 건물을 헐고 그곳에 포룸 율리움을 지었다. 포룸은 로마시대에 신전과 광장 그리고 바실리카로 구성된 공공복합 장소를 말한다. 포룸 율리움에는 카이사르의 기마상과 비너스 신전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비너스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포룸에 비너스 신전을 지었다.
카이사르의 성은 율리우스이다. 이는 로마 건국의 시조인 로물루스의 성과 같다. 로물루스는 처음 이탈리아 땅을 밟은 아이아네스의 후손이었으며 아이아네스는 비너스의 아들이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비너스의 핏줄이 자신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포룸에 비너스 신전을 지어 자신이 고귀한 신의 혈통을 가진 인간임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이후 시대를 거쳐간 영웅들은 모두 카이사르가 되고 싶어 했다. 신성 로마 황제와 나폴레옹이 그랬으며 러시아의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는 고유명사에서 황제를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당대 최고의 가문인 율리우스 집안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시를 짓고 시 낭송을 즐겼다. 또한 그는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최신의 머리스타일로 다녔으며 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카이사르가 성장하여 정치에 입문하자 그에게 숙적이 생겼다. 로마 최고의 권력자인 술라였다.
당시 로마는 마리우스의 평민파와 술라의 귀족파로 나뉘어 서로 정권을 잡으려는 내전 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고모와 결혼한 마리우스의 편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무시무시한 내전에서 마리우스가 패배하고 죽음에 이르자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소아시아로 도망쳤다. 소아시아로 가는 배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카이사르는 해적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해적들이 그의 몸값으로 20 달란트를 요구하자 이를 비웃으며 자신의 몸 값으로 50 달란트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를 여러 도시로 보내어 돈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 사이 카이사르는 해적들 틈에서 떵떵거리며 지냈다. 카이사르는 해적들과 농담을 나누고 놀이도 하며 소설을 읽어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너희들을 모두 잡아서 목을 매달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카이사르의 부하들이 몸값을 구해오자 카이사르는 곧장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해적들을 찾아내어 약속대로 모두 죽였다. 그 사이 로마에서는 술라가 죽었다.
혼란한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공개적으로 민중의 편에 섰던 마리우스를 기리며 연일 연회를 베풀었다. 빚도 그만큼 많아졌다. 하지만 그는 로마 시민들의 인기로 39세에 로마 종교의 수장인 대신 관직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집정관 바로 밑의 관직인 법무관에 올랐다.
이제 그는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 원정을 가야 했다. 스페인 총독이 되어 원정을 나서는데 많은 빚쟁이들의 항의로 로마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이를 해결해 준 사람이 당시 부동산 임대업으로 부자가 된 크라소스였다. 그의 보증으로 카이사르는 에스파냐로 갈 수 있었다. 에스파냐에 온 카이사르는 알렉산더를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지금 내 나이에
수많은 민족을 지배했는데
나는 내세울 만한 크고 명예로운 업적이 없으니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에스파냐에서 총독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집정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서 당시 성공한 군인이었던 폼페이우스와 거부인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펼쳐야 했다. 그는 삼두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곧 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갈리아로 떠났다.
오늘날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해당하는 갈리아에서 그는 2만 4천여 명의 백성을 다스렸다. 카이사르는 7년 동안 갈리아에서 8백 개 도시를 3백여 종족을 정복했으며 라인강 지역의 게르만족까지 점령하였다. 모든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그의 전쟁 능력이 이전의 살았던 모든 로마 장수들을 능가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8백 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3백여 개의 종족을 정복했다. 이 전투에서 사상자 수는 1백만 명이 넘었다. 카이사르는 모든 위험에 용감하게 도전했고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도 그를 막지 못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이전의 카이사르가 아니었다. 갈리아 전쟁을 통해 카이사르는 황제에 걸맞은 위용과 카리스마를 갖추었다.
그의 명성은 로마에까지 퍼졌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그를 두려워하여 무장한 채 로마로 들어오는 것을 법으로 만들어 공포하였다. 기원전 49년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남기며 카이사르는 로마 국경선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왔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도망가고 원로원의 의원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어떠한 보복도 없이 원로원을 존중하였으며 곧장 그리스로 넘어가 폼페이우스를 제압하였다. 이때 전설 속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카이사론이라는 아들을 가진다.
기원전 47년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불과 네 시간 만에 승리를 하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는 짧은 말로 로마에 승리를 알렸다. 56세가 되던 44년 2월 4일 종신 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는 그가 태어난 7월을 율리우스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것이 영어의 <JULY>이다.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백성들에게 빚을 탕감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원정으로 모든 토지를 빼앗긴 군인들에게 식민지를 나눠주었다. 이후 그는 알렉산더가 되고자 했다. 이미 갈리아와 게르만족을 평정한 그는 파르티아를 정벌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는 꿈을 꾸었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를 정벌하기 위해 떠나기 3일 전 원로원을 소집하고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날 파티에서 좋은 죽음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받고 카이사르는 예기치 않게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이야기했다. 자신감으로 호위병 없이 원로원에 도착한 그는 카이사르의 독재를 우려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서 23번의 칼에 찔려 암살당한다. 암살자들 중에는 그가 사랑했던 양아들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말은 양아들을 향한 말이었다.
부르투스 너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