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들의 공화정

두려움에 떨었던 황제들

by 손봉기

포룸 율리움을 지나 다시 콜로세움 쪽으로 걸어가면 포룸 아우구스투스와 포룸 네르바가 나온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전쟁의 신 마르스를 위한 신전을 세우기 위해 이 포룸을 만들었다.


당시 로마 제국이 팽창해지자 기존 포로 로마노 만으로는 로마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포로 로마노 동쪽에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토지와 추가 매입한 토지 위에 새로운 포룸을 짓기 시작하여 40년 만에 완성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왼쪽 위가 포로로마노이고 오른쪽 아래가 황제들의 공화정이다.





포룸 아우구스투스 옆에 있는 포룸 네르바는 콜로세움을 지은 베아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 아들인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짓기 시작하였으나 네르바 황제 시대에 완성되어 네르바 포룸이라고 한다. 네르바 포룸에는 지혜와 군사의 신인 미네르바를 위한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을 지키려던 암살자들은 절대 권력자를 암살하고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이 결국 로마 공화정의 종말로 이어질 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갈리아 정복 전부터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류층과 하류층 사람들, 특히 카이사르와 함께 많은 전쟁을 치른 병사들은 소수의 잘난 귀족 무리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인 데 분노하였다. 특히 카이사르의 직속 부하였던 안토니우스는 로마 민중의 슬픔을 이용하여 이들에게 복수를 맹세하였다. 며칠 뒤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열렸다. 포로로마노의 연설단인 로스트라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민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카이사르의 위대함을 연설하며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공개하였다.


유언장에는 테베르 강변에 있는 그의 개인 정원을 로마 시민에게 바치며, 모든 로마 시민에게 300 세스테르티우스씩 증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대중들은 카이사르를 연호하며 암살자들의 집으로 몰려가서 불을 질렀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간신히 피해 달아났지만 결국 처형되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안토니우스를 놀라게 하는 내용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심복인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라고 예상했는데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겨우 19살의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목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안토니우스가 에스파냐에서 암살자인 블루투스를 상대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빈약했던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복수전에서 승리한 다음 해인 기원전 40년, 때마침 아내를 잃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을 하게 되어 두 사람은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는다. 기원전 34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정신이 완전히 홀려서 동방 속주의 금싸라기 지역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넘긴다. 또한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옥타비아와 이혼하면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정적이 되었다.


전쟁에 강한 안토니우스는 자신만만하였다. 하지만 전쟁 경험이 많지 않은 옥타비아누스는 정치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그를 대신해서 안토니우스와 싸울 유능한 장군들을 뽑았다. 그때 뽑은 장군이 바로 자신의 친구이자 이후 자신의 사위가 되는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를 능가하는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기원전 31년, 아그리파의 도움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 군을 전멸시켰다. 그리고 이집트로 진격하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드디어 옥타비아누스는 오랫동안 지속된 로마의 내전을 종식하고 로마에 평화를 가져왔다.


기원전 27년 1월 원로원은 그에게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최상의 존칭인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한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에 따라 로마 달력의 여섯 번째 달을 아우구스투스로 개명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진정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는 사령관이 아니라 정치가라는 사실을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정치가는 어떤 사령관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숙적 파르티아와 전쟁을 하는 대신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지대에 평화가 정착되었으며 파르티아의 포로로 잡혀갔던 로마의 군인들이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그리고 모든 신들을 위한 판테온과 아폴론 신전 등 시민들을 위한 공공시설을 대대적으로 건축하였다. 이로 인하여 로마는 벽돌 도시에서 대리석 도시로 변하였다. 또한 그는 시민들에게 공연과 사냥 그리고 펜싱경기와 인공호수에서 펼치는 모의 해전 등 이른바 빵과 서커스를 제공했다. 이러한 성과에 로마 시민들은 아우구스투스를 신처럼 숭배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신이 아니었다. 카이사르의 암살을 경험한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는 원로원 회의 때도 토가 아래 갑옷을 입었으며 10명의 호위병들이 그를 지키게 하였다. 또한 그는 연회에서 만난 유부녀 리비아를 이혼시키고 자신이 새 남편이 되었으며 정적들의 위협과 시민들의 비판을 두려워한 아우구스투스는 평생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그는 임종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연기가 볼 만했습니까?
내 인생의 연극이 마음에 들었다면
박수를 쳐 주시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시대를 평화적으로 만들었지만 죽으면서 최고의 실수를 저지른다. 바로 핏줄에 집착하여 황제의 그릇이 안 되는 자신의 아들에게 황제직을 물려주었다. 그 결과 그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정신질환과 환청으로 공포정치를 하였으며 그가 죽고 새로운 황제가 된 이가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꼽히는 카리쿨라와 네로이다.


네로 황제 시대에 로마제국은 대 혼란에 빠진다. 혼란의 종식자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였다. 네로가 자살하자 동부 전선에 있던 그는 황제로 임명되고 로마로 돌아와 네로의 황금궁전에 콜로세움을 지으면서 정치적 안정을 찾는다. 이후 그의 아들 티투스가 콜로세움을 완성하며 100일에 걸친 개관식을 진행한다. 2년 후 티투스가 죽자 다음 황제직을 이어받은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독재와 전횡을 일삼으며 암살당하며 다시 로마는 혼란에 빠진다. 이후 로마 원로원은 의원 중에서 가장 덕이 있는 네르바를 황제로 임명한다.



64세에 황제가 된 네르바는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직한 법조인으로 미치광이 황제들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로마를 바로 세웠다. 우선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시대에 모독죄로 투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풀어주었다.


또한 추방당했던 사람들도 다시 귀환하게 하였으며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돌려주었다. 자비심이 많았던 그는 사회기금을 마련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토지를 살 때 재정을 지원하였다. 또한 기금이 부족하면 황제의 옷가지와 금과 은으로 된 식기 등을 팔았으며 심지어 황제 소유의 궁궐도 팔아 보충하였다. 네르바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지금 당장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더라도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네르바의 착각이었다. 그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여기저기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그가 타락한 로마를 바로 세우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네르바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재정을 담당하며 게르만 지역의 총독이었던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것이 네르바가 황제로서 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당시 네르바의 이런 결정은 거의 신적인 선견지명이라 불렸다.



네르바의 지명으로 로마의 새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는 당시 식민지 에스파냐 출신이지만 로마제국 시대의 그 어떤 황제도 비교하지 못할 업적을 쌓으며 팍스 로마나의 시대를 열었다.


네르바와 아우구스티 포룸을 나와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걸어가면 지나면 트라야누스 포룸이 나온다.


기원후 2세기 트라야누스 황제가 지은 트라야누스 포룸은 광장과 두 개의 도서관 그리고 시장과 바실리카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 잘 보존된 시장 건물에는 150여 개의 가게와 사무실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중동으로부터 수입한 실크와 향신료를 비롯하여 신선한 생선과 과일 그리고 꽃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을 팔았다. 당시 시장의 규모를 살펴보면 오늘날 백화점 규모와 맞먹을 정도로 크다. 포룸에 있는 두 개의 도서관 사이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둥이 있다.



101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에 해당하는 다키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모습을 이 기둥에 새겨 놓았다. 높이가 38m이고, 23번을 회전하는 부조의 길이만 190m에 이르는 기둥의 내부에는 꼭대기로 가는 나선형의 185개의 계단이 있으며 그 아래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유해가 있다. 2차례 다키아 원정을 일기를 쓰듯이 세밀하게 보여주는 트라야누스 기둥은 마치 전쟁터에서 종군기자가 찍듯이 전쟁의 치열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로마의 13대 황제이자 5 현제 시대 2번째 왕인 트라야누스는 가장 유능한 군인 황제였다. 그의 시대에 로마제국은 최고의 영토를 가졌다. 후대 황제들이 취임식을 할 때 아우구스투스의 행운과 트라야누스의 업적을 이어받아 황제 직을 수행한다고 선서해야 할 정도로 그는 위대한 황제였다.


서기 52년경에 로마의 식민지인 에스파냐에서 태어난 트라야누스는 뛰어난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게르마니아 지역의 총독을 맡다가 오현제의 초대 왕이자 재위 기간이 2년도 안된 네르바의 지명으로 서력기원 97년 10월에 황제로 즉위한다.


황제에 오른 트라야누스는 오랫동안 로마 국경을 위협했던 다키아를 정복하였으며 파르티아를 침공해 함락했다. 이후 그는 끊임없는 정복전쟁으로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동을 포함한 로마제국 최고의 영토를 가진 황제가 되었다. 또한 그는 내치에도 뛰어나 그는 우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원형경기장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재건하였으며 복지 편드 알리멘트를 만들어 실행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부자들에게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로 펀드를 조성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양극화된 로마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외 트라야누스는 당시 출처가 불분명하고 익명으로 신고된 기독교인의 탄압을 중지시키기도 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고령에 이르자 급속히 쇠약해졌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독살하려는 불안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뇌출혈로 부분적인 마비증세가 오다가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 20년간 로마를 통치한 그가 후계자도 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아내가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5 현제 시대는 계속 이어졌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 고전을 사랑해 많은 건축물을 남겼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5 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에게 <명상록>이라는 철학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아들 코모두스에게 암살당하며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다.


이후 로마제국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비롯하여 100년 동안 50명이 넘는 군인 황제들이 득세하며 몰락의 전초를 보였다. 이를 평정한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였다.


그는 로마제국을 4등분으로 분할하고 엄격한 군정으로 통치하다가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스스로 황제 직에서 사임하였다.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비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 황제를 물리치고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는 두 아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주며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지게 되었으며 476년 서로마는 게르만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다.



평등과 공동체를 중시하던 그리스와는 달리 자유와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한 로마는 포에니 전쟁 등 수많은 전쟁을 승리하며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의 패권 자가 되어 천 년을 넘게 유럽을 지배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공을 이룬 로마의 비결은 시민을 위한 정치와 개방성 그리고 상호 견제적인 정치문화에 있다.


로마의 황제들은 수많은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며 로마 시민들이 풍요롭게 먹고살 수 있도록 하였으며 경기장과 포럼 등 공공시설을 지어 시민들의 편리와 즐거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들은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최소화하고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그들 스스로 로마제국 안으로 스며들게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로마 시민권으로 누구든 일정 기간 로마 군대에 복무하면 로마의 시민으로 인정해주었다. 이를 통해 식민지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닌 로마의 시민이 되었고 로마시대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집정관이나 황제도 되었다.


로마의 영광을 가져온 마지막 비결은 상호 견제의 정치 문화이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로마사 논고>에서 로마 제국이 부패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이유로 평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호민관 제도를 만들어 황제와 원로원에 대항하여 합리적으로 경쟁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후 시민들을 위한 정치가 사라지고 황제들과 귀족들이 관직과 재산을 독점하며 견제에 의한 정치 문화가 사라지자 로마는 몰락했다. 그리고 새로운 천년을 지배할 기독교를 중세에 넘겨주며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로마 이전의 모든 역사가 로마로 흘러 들어왔다가 로마를 통해 중세시대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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