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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Nov 26. 2020

워싱턴 여행 2

미국을 상징하는 대통령

뉴욕 자유의 여신상과 함께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조형물으로 러시모아 바위산에 조각해 놓은 4명의 대통령 얼굴 조각상이 있다. 크기가 18m에 이르는 4명의 얼굴 조각상을 차례로 보면 왼쪽부터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이 조각은 1927년부터 1941년까지 조각가 거즌 보글러가 인부 400명과 함께 작업해 만든 것이다.


워싱턴의 중심에 있는 내셔멀 몰에 역시 미국을 상징하는 4명의 대통령 기념관이 있다. 앞에서 워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관을 둘러보았으니 이번에는 토마스 제퍼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기념관을 차례로 방문하자.


먼저 링컨 기념관에서 가까이 있는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을 방문한다.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양식으로 지어져 그리스 민주주의와 고대 로마로부터 내려오는 삼권분립의 정신을 상징한다.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이 대통령 중심의 행정부를 중요시했다면 제퍼슨은 의회를 중요시하며 상호 견제를 통해 지속적인 국가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워싱턴은 새로 출범한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인 국무장관으로 토마스 제퍼슨을 임명했으며 재무장관에 해밀턴을 임명했다. 제퍼슨과 해밀턴은 미국 초대 내각의 양대 축이었다. 연방주의자인 해밀턴은 효율과 질서를 중시하였으며 새로 탄생한 미국의 미래가 상공업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금융거래에 신용을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를 선호했다. 이와 반대로 반 연방주의자인 제퍼슨은 독재를 증오하고 자유를 중시하엿으며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영농들이 이끄는 농업 국가를 미국의 미래로 보았다. 하지만 두사람은 국가적 이익 앞에서는 서로 협력했으며 중앙은행 두 사람의 합작으로 설립되었다.


제퍼슨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제퍼슨 동상이 중앙에 서 있으며 그 앞으로 제퍼슨이 남긴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문장 일부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벽면과 내부 돔 사이에 적힌 제퍼슨의 맹세로 다음과 같다.


나는 신의 제단 앞에서,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를 영원히 용서치 않겠노라 맹세한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은 재산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그 권리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정부가 준 것이 아니며 정부는 인민의 공복이지 지배자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메리카 연방 국가들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영국의 왕권에 대한 모든 충성의 의무를 벗으며, 대영제국과의 모든 정치적 관계는 완전히 해소돼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토마스 제퍼슨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루지애나를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에게서 매입한 것이다. 그로 인해 동부에만 치우쳐 있던 미국에 서부 개척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하였다. 하지만 루지애나 매입은 제퍼슨에게 대통령은 헌법을 엄격하게 따라야 한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저버린 행동이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에게 새로운 영토를 획득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루지애나 매입 자금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1천5백 달러를 지출함으로써 재정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선거 공약도 스스로 폐기했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이득을 모두 버리고 루지애나를 매입한 제퍼슨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오직 국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고 있었다.


1800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새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식을 거행한 제퍼슨은 1804년 재선이 되어 다시 4년간 대통령을 지낸 뒤 1809년 4월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 버지니아의 고향마을로 돌아가 버지니아대을 설립하여 민주주의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죽을 때까지 실천하였다. 독립 선언 50주년에 사망한 그의 묘비명에는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단 한 마디도 없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버지니아 신교 자유법의 기초자이자 버지니아대학교의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


제퍼슨 기념관에서 조금 걸어가면 워싱턴의 유명 관광지인 벚꽃나무 거리가 나오고 그 옆으로 루스벨트 대통령 기념관이 나온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은 그의 기념관에는 힘과 권위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도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상징인 그리스 양식의 신전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 소통을 중시한 루스벨트 대통령답게 그의 기념관은 스토리를 담은 네 개의 열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통하여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도록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에 동참하여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해 국제 연합 설립을 주장하여 그의 사후 UN이 설립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루스벨트가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에는 그의 소통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직 시 미국은 대공황이란 초유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야당인 공화당이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게다가 언론마저도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불편한 몸을 이끌고 노동현장을 직접 찾아서 억울한 일을 당한 노동자와 이야기하였으며 매주 2번 이상 기자회견을 했다. 또한 그는 기자회견시 사전 답변서 없이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즉석에서 답했으며 주요 사안이 있을 때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직접 국민을 설득했다.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인 루스벨트 대통령 기념관은 4번의 재임 시기별로 분리하여 그에 적합한 상징물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각 전시실마다 보이는 폭포는 전시실을 이동할 때마다 그 흐름이 더욱 커지며 그의 재임 시절에 일어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등의 격변기를 상징한다.



루스벨트의 취임 장면을 재현한 부조 작품이 보이는 첫 번째 전시실로 들어가면 보이는 폭포는 대공황의 도래를 상징한다. 두 번째 전시실에는 대공황 시대에 시골 부부와 빵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라디오를 듣는 사람의 조각품이 있다. 특히 마지막 작품은 당시 라디오를 통해 직접 미국인들의 단합을 호소한 루스벨트의 소통의 리더십을 상징한다.



세 번째 전시실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등 격변과 혼돈의 시대를 거센 물줄기의 폭포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그의 애견 팔라와 함께 있는 루스벨트 동상이 보인다. 동상 옆 벽면에는 그의 연설문이 적혀 있다.


나는 부상당한 군인들이 피를 흘리고 도시들이 파괴당하고 어린아이들이 배고픔에 허덕이는 모습을 봤다.
나는 전쟁을 증오한다.



마지막 네 번째 전시실에는 루스벨트의 장례식 장면을 보여주는 부조와 부인 앨리너 루스벨트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에서 퍼스트레이디 동상이 있는 대통령 기념관에 있는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루스벨트 기념관을 나오는데 입구에 있는 문구가 눈에 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이다.




루스벨트 기념관에서 나와 백악관으로 이동한다. 백악관은 워싱턴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가장 먼저 지은 공식 정부 건물로 드넓은 광장과 잔디밭 위에 세워졌다.



1792년 공사를 시작하여 1800년 완공한 백악관은 제2대 대통령 존 아담스 대통령부터 현재까지의 대통령이 머문 곳으로 1812년에 일어난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이 불을 질러 시커멓게 탄 벽을 하얗게 칠을 하면서 화이트 하우스라고 불렀다.


3층 건물로 이루어진 백악관에는 132개의 방이 있으며 1층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고 2층과 3층은 대통령 일가가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사용된다. 둥근 베란다를 중심으로 1층의 서관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으며 동관에는 도서실과 외교관 응접실 그리고 기자회견장이 있다. 일반인에게는 동관만 개방하고 있다. 건물 한가운데 보이는 반원형 베란다는 역대 대통령 선서를 하는 곳으로 유명하며 서관 옆에 서 있는 아이젠하워 빌딩은 백악관 부속 건물로서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실이 모여 있다.


이제 워싱턴 투어의 마지막 일정으로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자.



1793년 9월 18일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초석을 내려놓으면서 건설된 국회의사당은 1800년 북쪽 윙이 완성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던 국회가 이곳으로 이전해오면서 본격적인 입법활동이 시작되었다.



국회의사당 안으로 들어가면 방문자 센터가 나온다. 국회 의사당을 건설할 때 노예 신분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2007년 12월 18일부터 노예해방 홀이라고 부르는 이 곳에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있는  6m 높이의 자유의 상이 전시되어 있다. 자유의 상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군사 헬멧을 쓰고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방패와 월계관을 들고 있다.



국회 의사당 투어에서 제일 처음 방문하는 곳은 지하 묘실이다. 이곳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안장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나 완공 전 워싱턴이 사망하여 무덤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대신 여러 조각상과 워싱턴에 관한 전시물로 채워져 있다.


다음으로 미국 국회의사당의 가장 중심에 있는 원형 홀 로툰다로 이동한다.



이 곳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이래 미국의 대통령들과 중요 인사들의 국장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미국을 방문하는 외국의 수반이나 특별한 빈객을 맞이하는 장소이다. 원형 홀 바닥에서 85미터 높이에 있는 돔 천장에는 <워싱턴의 신격>이라는 작품이 그려져 있다. 작품을 살펴보면 중앙에 조지 워싱턴이 하늘에 올라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고 그 주위로 미국 독립 당시의 13개 주를 뜻하는 13명의 여인들이 보인다. 또한 바깥족으로 전쟁, 과학, 해양, 상업, 공업, 농업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원형 홀의 벽면에는 미국의 역사적인 순간을 묘사한 8개의 작품이 걸려있다. 8개의 작품 중 4개는 존 트럼블이 그린 것으로 그 중 <미국 독립 선언서> <베닝톤 전투>가 가장 눈에 띈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1776 년에 토마스 제퍼슨과 존 핸콕 그리고 벤 프랭클린을 포함 해 47명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는 순간을 보여주며 <콘월리스의 항복> 은 영국군의 장군인 콘월리스로부터 최종 항복을 받아들이는 백마 위의 미국 장군 벤자민 링컨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항복으로 미국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다.



그 옆으로 종신 대통령으로 남아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사임하는 워싱턴의 모습도 보인다.


국회의사당 투어의 마지막 장소는 연방 조각상 홀이다.



이곳은 과거 미국 하원의 본회의장이었나 하원 의원이 400명이 넘어가자 다른 곳으로 확장 이전하여 지금은 미국 50개 주를 대표하는 시민들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조각상 중에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과 현대 시민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 그리고 제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의 조각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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