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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Nov 25. 2020

워싱턴 여행 1

미국의 건국과 민주주의 역사

1776년 12월 25일 새벽에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미국 독립군이 뉴저지 주의 트렌턴에 주둔한 영국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델라웨어 강을 건너고 있다. 이 전쟁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던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워싱턴 장군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당시 계약으로 묶여 있던 미 독립군 병사들의 계약 만료일이 다된 상황으로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준다 한들 연전연패하는 군대의 모병이 쉬울 리가 없었다. 또한 프랑스 등 영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 국가들 역시 패색이 짙은 미국 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서서히 철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워싱턴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결의해 차 있다. 하늘은 곧 벌어질 격전을 예고하듯 폭풍 전야의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으며 멀리 수평선에는 어스름한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워싱턴의 뒤로는 위싱턴에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먼로가 성조기를 들고 서있으며 배위의 독립군은 긴급히 모집되어 통일된 군복은커녕 훈련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농민병들이었으나 워싱턴의 지휘 하에 결연한 의지로 노를 젓고 있다. 배위의 병사들을 살펴보면 해방 노예로 보이는 흑인과 서부 출신의 소총수 그리고 뒤쪽의 농부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어 미국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승기를 잡기 시작했으며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영국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절대적인 공을 세운 워싱턴은 미국을 건국하였으며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독단적인 정책을 펼치기보다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 같은 유능한 인물을 중용하고 이들과 함께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에 종신 대통령으로 남아 달라는 국민의 요청을 뿌리치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물러나야 한다. 국민들과 함께 피 흘리면서 무너뜨린 영국식 왕정의 정치가 나의 3선 대통령 취임으로 다시 되살아날 수도 있으며 민주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선례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전통이 남아 현재 미국 대통령은 헌법으로 2선까지만 할 수 있다.



뉴욕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워싱턴을 찾는 여행자라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워싱턴 기념탑이다. 워싱턴 기념탑은 링컨기념관과 국회의사당 사이에 놓인 170m 높이의 거대한 탑으로 미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 형식의 워싱턴 기념탑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면 링컨 기념관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백악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백악관이 얼마나 꽁꽁 둘러싸여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워싱턴 기념탑을 내려와 링컨기념관을 향해 걸으면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가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운 병사에 대한 추모의 뜻을 담아 2004년 4월 29일에 완성된 이곳은 거대한 분수와 분수를 둘러싸고 있는 각 주를 대표하는 전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분수대에서는 두 개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대서양과 태평양을 상징하며 분수대 양쪽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상징하는 기념물 두 개가 서 있다. 분수대 옆쪽으로 돌아가면 담장이 나오는데 이곳에 전쟁의 시작부터 마지막 전사자 안장까지 그 전체적인 과정을 조각해 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분수에서부터 링컨 기념관 앞까지 가로 618m 세로 51m인 사각형 연못이 있다.



반사의 연못이라고 불리는 이 곳을 지나 링컨 기념관 계단 에 올라 연못을 다시 보면 618m 길이의 연 못에 비친 워싱턴 기념탑과 양쪽에 늘어선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최초로 민주주의를 실현한 그리스의 신전 양식으로 지어진 링컨 기념관은 36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는 링컨 대통령 당시 미국의 36개 주를 상징한다. 링컨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링컨 조각상이 있으며 그 양쪽으로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



제16대 미국 대통령인 링컨은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노예해방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보호한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지만 미국인의 입장에서 그 보다 더 큰 업적이 있다. 그는 농업을 주축으로 하는 남부와 공업을 주축으로 하는 북부로 갈라져 분열 위기에 처한 미국을 남북전쟁을 승리하며 하나된 미국을 만들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미국은 50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을 것이다.


노예해방 선언으로 모두에게 자유로운 나라를 만든 위대한 성자이자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통일된 나라를 지켜낸 그는 암살범의 총탄에 사망하였다. 존 부스라는 열렬한 남부 지지자 배우가 쏜 총에 맞아 숨진 날이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수난절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순교자적 이미지가 더욱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링컨의 신화는 전 인생의 걸친 불운에도 그것을 이겨낸 그의 불굴의 정신에 있다.


가난한 수선공으로 태어난 그는 가난으로 인해 학교는 9개월밖에 다니지 못하였으며 9살이었을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22살에 시작한 그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23살에 주 의회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4살에 다시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곧바로 부도가 났으며 17년 동안이나 빚을 갚아야 했다.이로 인해 그는 27살에 신경쇠약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이후 재기를 노린 그는 29살에 의회 의장직에 나셨으나 낙선하였으며 31살에 대통령 선거위원과 34살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끝없는 도전속에 그는 마침내 37살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39살에 다시 낙선하였다. 그리고 46살에 상원의원, 47살에 부통령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으며 49살에 다시 상원의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그는 51살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7번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일어선 그는 수 많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 통합의 정치를 편 결과 전 세계가 사랑하는 인물이 되었다.  


링컨 동상을 등지고 나와 링컨 기념관 계단에 서면 이곳 에서 연설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떠오른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에 서명한 지 1백 년이 되는 1965년 8월 링컨 기념관 앞에는 20만 명이 넘는 흑인과 백인들이 모였다. 그들은 비행기와 자동차 그리고 버스를 타고 흑인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한 킹 목사의 연설을 경청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킹 목사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주 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마틴 루터 킹은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애틀랜타 모어하우스대에서 신학을 배웠으며 보스턴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침례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던 중 한 흑인 여성이 시내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흑인과 백인의 좌석을 구분하는 버스를 타지 않는 보이콧 운동을 벌였으며 1년 넘게 이어진 이 운동은 결국 좌석을 구분하는 앨라배마주의 법이 위헌이라는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후 그는 비폭력 흑인 인권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어나갔으며 1964년 최연소의 나이인 35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자만 그로부터 4년 후 암살당했다.



링컨 기념관을 중앙에 두고 앙 옆에는 베트남 전쟁 기념관과 한국 전쟁 기념관이 있다. 먼저 베트남 기념관으로 가면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 이름이 적혀 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이 가장 반대했으며 또한 유일하게 미국이 패한 전쟁이지만 군인들의 명예는 지켜주고자 1982년 이 기념관을 세웠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기념관 맞은편에눈 한국 전쟁 참전 용사비가 있다.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군인을 기리기 위해 1995년에 설립한 이곳에는 19개의 동상이 보인다. 한국의 거친 지형을 상징하는 화강암과 향나무 수풀 사이에 전투 장비를 갖추춘 육군 14명과 해병 3명 그리고 해군과 공군 각 1명은 당시 한국전에 참가한 19개의 소대를 상징한다. 동상은 실제보다 조금 2m 크기로 제작됐으며 각각의 무게는 500kg에 달한다고 한다.



동상을 따라 길이 50m 두께 20cm의 화강암 벽이 세워져 있는데 벽에는 한국전에 참여한 군인과 장비를 보여주는 2,500장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으며 벽 옆으로 희생을 상징하는 기억의 연못이 있다. 연못 위로 보이는 대리석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Freedom Is Not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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