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축구장 60개의 넓이로 세계 최대 크기의 이집트 박물관은 2019년에 부분 완공되었으며 2022년 전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유리 피라미드 모양의 이집트 박물관은 박물관에서 약 2㎞에 떨어진 기자의 피라미드와 조화를 이루며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실제 박물관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뜨거운 태양 아래 웅장하게 서 있는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가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박물관 1층 입구에 있는 넓은 홀에는 무게 80톤에 12m의 높이를 자랑하는 람세스 2세의 석상이 늠름한 자태로 서 있다. 3천 년 전 만들어진 이 석상은 카이로 도심에 전시되어 있다가 2006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집트 역사상 가장 방대한 제19 왕조의 창시자는 람세스 1세이다. 하지만 그는 워낙 고령에 즉위하여 2년 만에 죽는다. 그 뒤로 세티 1세가 삼십 년간 이집트를 통치하였으며 그다음 왕위를 계승한 왕이 람세스 2세이다.
람세스 2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스무 살에 반란군을 지휘하는 등 전쟁 경험이 풍부하여 집권기에 수차례 전쟁을 통해 현재 시리아에서부터 수단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그는 건축 왕으로 아스완과 룩소르에 아부심벨 신전 등 많은 건축물을 세워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아로새기고자 하였다.
람세스 2세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한다. 그는 부인 네페르타리를 비롯하여 50명이 넘는 아내와 200명이 넘는 자녀를 가졌다. 훗날 람세스 2세의 미라가 발견되어 분석해 본 결과 그는 매부리코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키는 165센티미터였다고 한다. 람세스 2세 사후 이집트는 본격적인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고대 이집트는 크게 고 왕국 중 왕국 신 왕국으로 나누어지며 고 왕국은 기원전 3,100년 전부터 나메르 왕이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면서부터 시작한다. 고 왕국 시대에 가장 유명한 피라미드이며 그리고 중 왕국시대를 지나 기원전 1,500년경부터 신 왕국이 시작된다. 고왕국과 신왕국 사이에 1천5백 년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박물관으로 입장하여 고대 이집트를 역사를 시작한 나메르왕의 팔레트부터 감상하자.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를 통일한 나메르 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팔레트는 나메르 왕이 하 이집트를 정복한 당시인 기원전 3,100년경에 제작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화장을 하였는데 이때 팔레트를 사용하였다. 팔레트에 구멍이 파여 그 안에 가루나 덩어리 화장품을 넣은 다음 물을 섞어 사용하였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에 돌판으로 만들어진 나메르의 팔레트는 신전에 바치는 장식용이었다.
나메르의 팔레트 앞면은 나메르 왕이 곤봉을 들고 아래쪽에 있는 사람을 내리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나메르 왕이 하이집트를 정복했다는 의미로 작품에서 나메르 왕이 쓰고 있는 모자는 상 이집트를 상징한다. 나메르 왕의 얼굴 앞에는 매와 식물이 보이는데 이는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호루스와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이다. 그리고 나메르 왕 뒤에서 파라오의 신발을 들고 있는 비서실장은 그의 신분이 파라오보다 낮음을 보여주기 위해 작게 그렸다.
이 작품에서 이집트 예술의 원리인 정면성이 보이는데 왕의 얼굴은 옆으로 그리고 눈은 정면에서 그렸다. 또한 왕의 어깨와 상체는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다리는 측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러한 표현이 한 인간의 특징과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어 죽은 사람이 자신의 육체를 쉽게 찾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나메르의 팔레트 뒷면 역시 하이집트를 정복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가장 위쪽에 새겨진 두 마리 황소 사이에 신성문자로 나메르의 왕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바로 그 아래 승전기를 든 병사들 뒤로 크게 조각된 나메르 왕이 걷고 있으며 반대편에는 목이 잘린 적군의 시체가 널려 있다. 그리고 팔레트의 중간 부분은 표범 머리를 한 괴물이 싸우고 있는데 두 마리의 긴 목 사이에 보이는 홈이 화장을 개는 곳이다. 팔레트의 맨 아래쪽을 보면 거대한 황소가 성벽을 뿔로 받아서 무너뜨리고 있는데 여기서 황소는 파라오의 힘을 상징한다.
다음은 서기의 좌상을 감상하자.
당시 서기는 처음으로 글을 적어 모든 것을 보관하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오늘날 컴퓨터를 운영하는 것과 같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서기 좌상은 보고 듣는 것을 써야 하는 직업의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눈과 귀를 돋보이기 만들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파피루스이다.
다음은 미라 전시관으로 이동하자.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 강의 주기적인 범람과 밤낮을 보며 죽음이란 그저 낮에서 밤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며 영생불멸을 믿었다. 그래서 밤을 떠돌던 영혼이 낮이
되었을 때 찾아 들어갈 집인 육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미라를 제작했다.
미라 제작과정은 먼저 시신을 정화시키는 예식을 거행한 후 시신 옆구리에서 대장과 간 위 폐 등 심장을 제외한 모든 장기를 꺼내어 물기를 제거한다. 꺼낸 장기는 시신과 함께 천연 탄산소다로 방부 처리한 후 항아리에 담았다. 다음은 코로 긴 관을 집어넣어 뇌를 제거하고 시신의 찢어진 부분은 모두 봉합하고 붕대를 겹겹이 감아서 송진으로 코팅 처리를 하면 미라를 만드는 의식은 끝난다. 그다음에는 미라를 붕대로 감고 목관과 석관에 넣어 장기를 담은 항아리와 함께 무덤 속에 안치하는데 이 과정이 70일이나 소요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사자의 서 전시관을 감상하자.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의 관에 미라와 함께 매장하였던 사후세계에 관한 안내서이다. 망자가 무사히 저승세계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뜻에서 만들어진 사자의 서에는 수 백 종류의 주문이 적혀 있고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위에 보이는 사자의 서는 이집트 인들이 생각하는 죽음 뒤의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사람이 죽으면 맨 왼쪽의 상단에서 보이는 14명의 신 앞에서 자신의 생전에 저질렀던 살인, 폭행, 절도, 강간, 거짓말과 같은 42가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죄의 부정 고백>이라는 예비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 절차가 끝나면 그 아래에 보이는 저울 앞으로 가서 자신의 심장을 저울에 단다. 저울 한쪽에는 마아트의 깃털이 올려져 있는데 마아트는 고대 정의의 신이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의 심장은 마아트의 깃털과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의 심장은 깃털보다 무거워 저울에서 떨어지게 된다. 이때 저울 옆에 보이는 괴물 암무트가 심장을 먹어버린다. 심장을 잃으면 죽은 자의 영혼은 영원히 사후세계로 가지 못한다.
사자의 서 가장 오른쪽에 저승의 왕 오시리스가 보인다. 두 번을 죽고 부활한 오시리스의 얼굴은 녹색을 띠고 있다.
녹색은 오시리스가 농업의 신이며 푸른 식물처럼 부활하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심판을 통과한 자는 오시리스로부터 카노푸스 단지를 돌려받고 영원하고 평화로운 사후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사자의 서능 현실이 힘들더라도 양심적이고 정의롭게 산다면 평화로운 내세를 갈 수 있다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다.
다음은 카노푸스 단지를 감상하자.
이 항아리들은 말린 장기를 담은 것으로 네 개가 한 세트이다. 카노푸스라고 부르는 항아리 뚜껑에는 각 장기의 수호신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사람 머리를 한 임세트는 간을 담고 원숭이 머리를 한 하피는 허파 그리고 재칼의 머리를 한 두아무테프에는 위를 담으며 매의 머리를 한 케페세누프는 창자를 담았다.
이제 수많은 왕과 왕족들의 미라가 있는 왕족 미라 전시관으로 이동하자.
왕족 미라관에는 신왕국의 전성기를 이룬 하트셉수트와 아멘호테프 2세 등 수많은 파라오의 미라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수많은 도굴꾼들에 의해 무덤이 다 파헤쳐져 현재 조그만 유리관에 남아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생무상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박물관의 투탕카멘의 유물을 감상하자.
이집트 신왕조 중 18 왕조의 파라오 중 가장 혁명적인 파라오는 아멘호테프 4세로 그는 기원전 1353년부터 1335년까지 약 2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는 보수적인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선대 왕이자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 때문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는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는 투트모세 3세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이루어 낸 성과로 인하여 이집트 역사상 가장 번영한 이집트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며 모든 것을 제사장과 관료에게 맡겼으며 평생 여자와 술에 빠져 살았다. 그는 정비 외에도 10명가량의 비를 거느렸고 그것도 모자라 3백 명의 미녀들을 항시 대기시켰다고 한다. 당연히 아멘호테프 3세의 시대에 제사장과 관료의 힘은 파라오를 넘가할 정도로 세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물려받은 아멘호테프 4세는 왕권을 회복하고 제사장의 권력을 약하게 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3천 년이나 이어온 이집트의 종교 체계를 뒤집어야 가능한 혁명이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지금까지 다신교였던 이집트의 종교를 태양신 아톤만 섬기는 유일신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아톤 신을 추종하는 의미를 지닌 아크나톤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일신 아톤만이 자신의 왕권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퍼뜨리고 싶어 했다. 그는 나일강 근처 아마르나로 수도까지 옮겨가며 혁명을 꿈꾸었지만 실패했다.
그가 죽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파라오가 투탕카멘이다. 하지만 그 역시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의문을 죽음을 당한다. 살아생전 비운의 왕이었던 투탕카멘은 그가 죽자 입구 쪽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치에 조성되었으며 그 크기도 작았다. 이 때문에 왕들의 계곡에 있던 파라오의 무덤은 대부분 도굴당하였는데 투탕카멘의 무덤만 도굴당하지 않았다. 무덤의 위치와 크기로 인해 당시 도굴꾼들은 투탕카멘의 무덤을 이집트 인부들이 쓰던 간이 숙소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투탕카멘의 무덤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감상하자. 가장 먼저 기원전 1,300년경에 제작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와 궤짝을 감상하자.
순금의 무게만 11킬로그램인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투탕카멘의 얼굴 위에 놓을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마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푸른 돌은 라피스 아즐리로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생산되는 귀중한 보석이었다. 황금 마스크를 장식하고 있는 푸른 돌은 왕을 위해 먼 곳에서 이 귀한 재료를 공수해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스크를 자세히 보면 머리 부문은 코브라와 대머리 독수리로 장식되어 있다. 코브라는 하 이집트를 지키는 상징이었으며 대머리 독수리는 상 이집트를 지키는 상징으로 이 둘을 새겨놓아 통일 이집트 왕국의 왕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 마스크의 주인이 파라오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왕족만이 가지고 있는 턱수염 주머니를 얼굴 밑에 조각해 놓았다.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견된 궤짝에는 전자를 타고 용맹하게 전장을 누비는 투탕카멘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실제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파라오에게 위대한 전사의 능력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다음은 투탕카멘의 펜던트를 감상하자.
먼저 펜던트의 중앙에 영생과 부활을 상징하는 딱정벌레가 보인다. 그리고 딱정벌레 위쪽에 파라오의 권위와 보호를 상징하는 호루스의 눈이 있으며 그 양옆으로 고귀함을 상징하는 코브라가 태양의 배를 타고 있다. 딱정벌레 아래에는 창조와 생명을 상징하는 연꽃무늬가 보인다. 상징성과 장식성이 높은 이 작품은 이집트 박물관이 자랑하는 걸작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투탕카멘의 황금 의자를 감상하자.
먼저 황금 의자의 팔걸이에는 멋진 날개를 펼친 독수리가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팔걸이 아래에는 갈기 달린 수사자가 파라오를 지키고 있는데 수사자의 다리 네 개가 의자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의자 뒤쪽에는 코브라가 버티고 서서 뒤에서 접근하는 적으로부터 파라오를 보호하고 있다. 또한 의자의 등받이 부분에는 투탕카멘과 그의 부인이 보이는데 두 사람 위로 태양의 신인 아톤이 광선을 쏘며 축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투탕카멘의 항금 의자는 왕의 권위와 위대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