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다.
그는 동생과 두 하인을 데리고 몽방투 산에 올랐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역에 있는 몽방투는 해발 1911미터로 바람이 많아 바람의 산이라고 부른다.
그가 어느 정도 산을 오르자 지나 간 첫사랑인 라우라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모습을 지우려고 머리를 저었다. 세속적인 사랑과 명성 그리고 부는 찰나적이며 오직 종교적 귀의만이 인간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늘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라우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세속적 쾌락과 명성을 갈구하는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세속적 번뇌가 있을 때마다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면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모든 고민들이 서서히 사라졌다. 더욱이 라벤다 향이 짙은 숲길을 지날 때면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4시간의 힘겨운 산행 끝에 산 정상에 오른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르는 피레네 산맥을 바라보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리용 주변의 야산과 넓은 바다로 이어지는 론 강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에서 느끼는 고요함이 좋았다. 그렇게 넋 놓고 산 아래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고대 로마 작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다.
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이 아무리 경이롭다 하더라도 세속의 사물인데
그보다 더 소중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일순간 그의 내면에 부끄러움이 일어났다. 그는 대 자연만큼 소중한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히며 내려올 때까지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피렌체 역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걸으면 피렌체 대성당이 나타난다. 흰색과 분홍색 그리고 녹색의 대리석으로 장식된 피렌체 대성당은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다.
꽃봉오리에 해당하는 거대한 돔 지붕인 쿠폴라는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이별을 앞둔 연인이 10년 뒤 만나기로 한 약속한 장소로 피렌체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이 곳에 오르기를 원한다.
464개의 계단을 따라 높이 106m의 쿠폴라에 올라서면 붉은 지붕을 한 피렌체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곳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11세기 말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서유럽의 수많은 기독교 국가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십자군 전쟁을 시작하였다.
13세기까지 8차례 십자군 원정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십자군 전쟁을 주도했던 왕과 귀족세력은 몰락한다. 그 대신 십자군 길목에 있었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금융 그리고 숙박을 제공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이 도시들은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왕과 귀족들을 대신하여 상인들이 자치권을 가진 국가를 만들었다. 그 국가들이 오늘날 피렌체와 베네치아 그리고 피사이다. 도시국가를 이룩한 상인들은 급증하는 인구와 자신들이 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큰 성당을 지었다.
피렌체 상인들 역시 세상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성당을 짓기 시작한 지 100년이 지난 1400년도 초까지 거대한 성당의 지붕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초기 피렌체 상인들은 중세시대의 하늘로 치솟는 첨탑을 지닌 고딕 성당을 원했지만 200년이 세월이 지나자 당시 유행하는 로마식 돔을 성당의 지붕 위에 올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지름 47미터의 거대한 돔을 올릴 기술이 부족했다. 1417년 피렌체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상금을 걸고 공모전을 하였으며 최종 당선된 사람이 브루넬레스키였다.
그는 이전에 한 번도 건축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고대 로마의 판테온을 연구하며 중간 지지대 없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올릴 계획안을 만들어 당선되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그의 계획안을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계란을 탁자에 깨트려 세우며 계란 밑부분이 깨어져도 위에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계란 안에 막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껍질과 내부 막으로 구성된 계란과 같이 대성당의 돔 역시 이중 천장을 만들어 하중을 분산한 후 판테온처럼 아래서부터 차례로 벽 돌을 쌓아 올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판테온의 둥근 지붕은 아래 부분이 6미터로 넓고 두껍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얇고 가벼운 돌을 사용해 윗부분은 1.6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이를 연구한 브루넬레스키는 먼저 돔 아래 부분을 넓게 확보하고 지붕 꼭대기까지 6 각형의 이중 나무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무 틀을 따라 그물을 짜듯이 벽돌을 가로 세로로 엮어 쌓으면서 부력을 높였다. 그리고 두께를 줄이면서 점점 기울여 쌓아 갔다. 점차 이중 구조의 천장이 조금씩 완성되자 브루넬레스키는 두 천장을 지지대로 서로 연결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작업은 무척 어려워 1년에 2미터씩 밖에 올릴 수 없었다. 마침내 16년 만에 돔이 완성되었다.
1436년 피렌체 시민들은 피렌체 하늘 아래 거대한 돔이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자부심에 북받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중세의 고딕 양식을 벗어나 고대 로마의 돔을 완성하며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쿠폴라를 내려와서 성당을 나서면 조토의 종탑이 보이는 광장이 나타난다. 이 광장의 모서리에 피렌체 대성당을 설계한 아르놀포 캄비오과 브루넬레스키의 조각상이 나란히 하고 있다.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가 있기 20년 전인 1366년 유럽 인구 절반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가 지나가자 피렌체 상인들은 도시를 재건하면서 신께 감사의 표시로 산 조반니 세례당의 북쪽 청동문을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산 조반니 세례당은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에게 봉헌한 곳으로 피렌체 대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대성당으로 사용되었으며 남쪽 문만 청동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세례당의 북쪽 청동문 제작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 공모제로 담당자를 선정하였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사람이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다.
경합의 내용은 일정 양의 청동을 주고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희생 장면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희생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이를 제지하는 내용이다. 경합의 승자는 기베르티였다.
피렌체 바르젤로 성당에 가면 당시 경합했던 두 청동부조를 볼 수 있다. 이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동감이나 긴장감에 있어서 단연 브루넬레스키 작품이 우세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당시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작품을 선정하였다. 그의 작품이 청동이 적게 들어 비용이 저렴하였기 때문이었다.
공모에 당선된 기베르티는 예수의 일생을 보여주는 북쪽 문을 21년 만에 완성한다. 예술성 높은 북쪽 문이 완성되자 마지막 남은 동쪽 문 역시 제작을 맡아 다시 27년이 지난 1452년 완성하였다.
동쪽 문은 황금색으로 장식되었으며 이전의 북쪽 문에 비해서 조각된 인물들이 배경에서 튀어나온 듯 입체감을 가진다.
동쪽 문을 장식하는 동안 유행이 바뀌어 원근법과 명암이 적용된 르네상스 양식이 성행했는데 기베르티는 이를 적용하여 동쪽 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후일 미켈란젤로는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동쪽 문을 천국의 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동쪽의 문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창조>과 <십계명을 받는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 10장면을 담고 있다. 기베르티 자신의 얼굴도 문 중앙에 사인처럼 새겨 놓았다.
천국의 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작품은 카인과 아벨이다. 작품 아래에서 밭을 가는 아벨과 양 떼를 지키는 카인이 보이고 위쪽으로 멀리 제단을 차려 제를 올리고 있는 형제의 모습도 보인다. 중앙에는 카인이 아벨을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 상단에는 늙은 아담과 이브가 대낮의 비극을 눈치채지 못한 채 오두막 앞에 웅크리고 있다.
이 부조의 압권은 오른쪽 하단에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카인이다. 동생인 아벨을 죽인 그는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뻔뻔스럽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라며 한 손을 들어 삿대질을 하고 있으며 다른 손에는 피 묻은 방망이가 들려 있다.
카인은 머리를 돌리고 있어 그의 뒤통수가 빤질거린다.
예술성과 능력면에서 기베르티보다 나았지만 비용상의 문제로 세례당의 청동 문 공모전에 탈락한 브루넬레스키는 실의에 빠져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건축물에 매료되어 건축가로서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 이후 20년의 시간이 흐른 1417년에 벌어진 대성당의 돔 공모전에 응시하여 담당자로 선정되면서 그의 능력을 세상에 마음껏 펼쳤다.
피렌체 대성당 뒤로 가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이 나온다. 이 곳은 피렌체의 대성당을 건축하던 감독관과 인부들이 이용하였던 건물이었다.
1436년 대성당이 완성되자 대성당의 유지보수를 맡는 사람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가 최근에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천국의 문>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초기 르네상스 조각의 창시자였던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갈릴리 호수 연안에 위치한 막달라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자신에게 붙어있던 7마리의 귀신을 쫓아준 예수에게 감사하여 그를 따라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생존을 위해 몸을 팔다가 바리새인에게 잡혀 죽을 뻔하였으나 예수가 나타나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고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도망갔으며 마리아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예수의 제자가 된 그녀는 예수가 체포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부인하고 달아나는 상황에서도 예수의 곁을 지켰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 삼 일이 되는 날 그녀는 예수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다. 그때 예수가 부활하여 부활한 예수를 가장 먼저 만난 여인인 그녀였다. 그녀는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라고 불렀을 때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충만한 사랑의 힘을 느꼈다. 이후 예수가 승천하자 그녀는 죽을 때까지 사막에서 고행의 삶을 살았다.
도나텔로가 조각한 실물 크기의 막달라 마리아 조각상은 젊고 아름다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다. 도나텔로는 예수가 승천하자 모든 것이 덧없고 의미 없음을 깨달은 막달라 마리아가 회개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가 고행하는 모습을 담았다.
늙고 추한 그녀의 모습에서 중세시대 성인의 경건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30년간 고행으로 인해 온갖 고난을 받은 그녀의 모습 속에 영혼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도나텔로는 당시 유행하던 견고한 대리석 대신에 부패하기 쉬운 나무를 사용하여 썩고 부패하는 육체 속에 깃든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을 향한 중세시대의 그림이나 조각상은 표정이 없으며 경건하게 표현되었다. 하지만 도나텔로의 조각상은 고난 받는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며 인간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상이 되었다.
오페라 박물관에서 나와 대성당 옆에 보이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많은 여행객들이 모여 있는 단테 하우스가 나온다.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가 1265년에 태어난 이곳은 근래에 들어서 복원한 곳으로 내부에는 단테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단테 하우스 옆 골목에는 그가 평생을 사랑했던 연인 베아트리체가 결혼을 한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이 있다.
지금도 성당 안에는 베아트리체가 결혼을 하는 장면을 몰래 지켜보는 단테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걸려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운 사람들이 피렌체의 상인이라면 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이 단테이다.
단테는 중세 천년 동안 신의 구원을 받기 위해 엄숙한 삶을 살았던 중세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인간의 달콤한 사랑을 공개적으로 노래하였다.
해마다 5월 1일이면 피렌체의 유력 가문들은 봄맞이 파티를 열었다. 여기서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고 첫사랑에 빠진다. 당시 단테는 9살이었다. 이후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쫓아다녔고 그녀가 매일 아침 기도하는 산타 마르게리타 성당을 수 없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소심한 단테는 그녀에게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9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그 어느 날 운명적이 만남이 이루어졌다.
단테는 그날도 베아트리체 집을 지나 아르노 강가에 있는 베키오 다리 부근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다리 건너편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단테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단테는 수줍어하면서 우물쭈물 한 마디도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녀가 말을 건넸다는 사실에 마치 우주를 얻은 듯 기뻐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2년 후 단테는 부모님이 정해 준 젬마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단테의 나이 20살이었다. 다시 2년 후 베아트리체 역시 21살에 은행가에 시집갔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지나자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16년간 자신의 가슴속에 자리해 온 여인을 잃은 충격에 단테는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단테는 그녀에게 바친 연시를 모아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후 단테는 정치에 몰입한다. 공직생활을 하며 신흥 상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 반대편에 있던 교황을 반대하는 정당의 당원이 되었다.
1370년 단테가 프랑스로 외무를 보러 간 사이 교황파가 피렌체의 정권을 잡자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다른 도시들을 떠돌게 된다. 이때 집필한 책이 <신곡>이다.
서기 1300년 부활절 기간에 사후 세계로 순례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신곡>은 지옥과 연옥에서 각각 3일을 보내고 천국에서 하루를 보내는 여정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단테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지옥을 먼저 여행한다.
그리고 참회 속에 구원을 기다리는 연옥을 지나 천국에 도달한다. 천국에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인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단테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천국으로 날아오르며 구원을 받는다.
단테는 <신곡>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도 끊임없이 신의 구원 대신 인간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기독교적 보수성이 극에 달했던 중세시대에 사랑과 같은 감정은 직접 표현할 수 없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단테는 인간의 세속적인 사랑은 죄가 아니라 마땅히 인간이 누려야 할 행복의 감정이라며 이를 노래하였다.
그 감정이 바로 돌체 DOLCE였다.
인간의 감미로운 감정을 최초로 노래한 그는 중세시대를 끝내는 종결자가 되었다. 신 중심의 중세시대를 끝낸 종결자가 단테라면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은 사람은 페트라르카였다.
피렌체 근교 아레초에서 태어난 그는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 번민했다.
그리고 세속적 자신을 잊기 위해 몽방투 산에 올랐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신과 자연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는 인간의 사랑과 감정을 담은 <카초니에레>라는 서정 시집을 출판하며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