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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쉬르 와즈

고흐의 마지막 안식처

by 손봉기 Feb 04. 2021

수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의 소음에 지친 도시 여행자들이 역장도 역무원도 없는 작은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에 도착하면 그 고요함과 깨끗한 공기에 금방 매료된다. 기차역을 나서면 사람은 찾아볼 수도 없고 간간히 차량만 지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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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가장 먼저 방문할 곳은 고흐의 정신과 의사이자 화가였던 가셰 박사의 집이다. 가셰의 집은 오베르 역에서 왼쪽으로 20분 이상 걸어가면 주택가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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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하는 가셰의 집은 현재 반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과 사진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 고흐를 오베르 쉬르 와즈에 초청한 가셰는 고흐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거나 남는 방을 내어주지 않았다. 또한 고흐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도 정원까지만 허락하였으며 가난한 화가의 모델도 단 한 차례만 허용했다. 그는 고흐를 이방인으로 대하였으며 그의 예술성을 알아보았지만 마음으로 품어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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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인간의 슬픔을 담은 가셰 박사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넣었다. 작품 속 주인공은 환자이자 의사이며 고통받는 사람이자 치유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 작품을 상처 받은 마음을 표현한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이야기한다. 고흐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가셰 박사의 초상을 우울한 모습으로 그렸다. 누가 보면 인상 쓰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슬프지만 점잖고 지적이다. 앞으로 초상화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셰 박사의 집을 나와 한적하면서 예쁜 산책길을 따라 오베르 성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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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친구인 이탈리아 은행가가 지은 오베르 성은 성이라고 하기에는 소박한 규모이다. 프랑스식 정원이 인상적인 이곳을 방문하면 오베르에 살았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사진 500여 점을 영상으로 만들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멀티 비디오 쇼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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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성을 나와 조금만 걸으면 압생트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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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압생트를 마시기 위해 즐겨 찾던 카페를 개조해  만든 압생트 박물관은 당시 모습을 보존한 바와 압생트를 마시는 기구와 자료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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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도수가 최고 90도인 압생트는 초록 요정이라며 불리며 음주자의 뇌세포를 파괴하고 환각을 불러일으켜 스위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여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아를에서 고흐 역시 고갱이 떠나간 후 괴로움에 압생트를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다.


압생트 박물관을 나와 내리막길로 내려오면 도비니의 정원이 나온다. 도비니의 정원은 안타깝지만 개인 소유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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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도비니는 수많은 화가를 오베르 쉬르 와즈로 모이게 했던 장본인이자 캔버스를 야외로 들고나가 그림을 그리는 문화를 이끈 선구자였다. 또한 그는 살롱전의 엄격한 심사와 규제로부터 벗어나 화가의 자유로운 정신을 강조한 인상파 화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고흐는 도비니의 저택을 그리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는 예술가의 집과 정원을 그리고자 했다. 작품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외로이 탁자 옆에 서 있는 도비니 부인과 신비롭고도 생기발랄한 고양이 그리고 그들을 모두 감싸 안은 정원과 저택의 이미지는 고흐가 꿈꾸는 완벽한 예술가의 집이었다. 하지만 고흐가 처한 현실은 아름다운 도비니 정원과는 달리 어둡고 삭막했다. 시내로 나가 고흐가 외롭게 살다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라부쉬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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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오베르 쉬르 와즈로 와서 5개월간 머물렀던 라부쉬 여관은 1987년 벨기에의 사업가가 이 집을 구입해 고흐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밀밭 근처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한 고흐는 이곳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방에는 의자와 빈 액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고흐의 옆방에는 그의 일생을 보여주는 영상물이 상영되며 그의 삶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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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쉬 여관 1층에 있는 식당은 고흐와 세잔 등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들던 때인 19세기 분위기를 유지하며 생전에 고흐가 자주 먹었던 음식들을 메뉴로 내놓으며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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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부쉬 여관 앞 광장으로 가면 시청이 나오고 밝은 분위기의 고흐 작품이 담긴 게시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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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는 이 작품을 라부쉬 여관 주인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그의 사후 이곳을 찾은 화가들에게 헐값에 넘겼다고 한다. 시청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반 고흐 공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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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돌담으로 둘러싸인 공원 중앙에 입체파 조각가 자킨이 만든 고흐 조각상이 있다. 앙상하게 마른 그의 모습에서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처절함이 느껴진다.


공원을 지나 좁은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오베르 성당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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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의 성당은 시골 마을의 성당답게 작고 소박하지만 앞으로 정원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이 지나는 길과의 거리를 두어 교회의 경건함을 유지하고 있다. 교회 옆으로 고호가 그린 < 오베르의 성당> 작품이 담긴 게시판이 보인다.

오베르의 성당을 보고 게시판에 있는 고호의 작품 < 오베르의 성당>을 보면 고호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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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의 작품 < 오베르의 성당>을 자세히 살펴보면 평범한 성당 앞마당은 파도처럼 물결치는 붓 터치로 꿈틀거리며 생명력이 넘친다. 돌로 만든 성당 역시 벽과 지붕은 압축된 공간 안에 끼여 비뚤비뚤해 보인다. 성당 지붕은 푸른색과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길 위를 걸어가는 여인은 성당의 무시무시한 형상에 눌려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성당 위로 코발트 빛 하늘은 그 빛이 너무 짙어 딱딱한 평면적 공간으로 보인다. 고흐 특유의 살아서 꿈틀대는 듯한 격렬한 터치와 강렬한 색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고흐 작품에서 가장 화려한 것으로 고흐의 원숙한 기량을 보여준다.


오베르 성당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면 공동묘지가 나온다. 이곳 한구석에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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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의 명성에 비한다면 너무나 초라한 무덤에서 그의 위대성이 더욱 진하게 발산된다. 많은 여행자는 고호의 무덤에 머리를 숙이고 숙연한 마음으로 고호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고흐의 무덤을 나와 오솔길을 따라 가면 고흐의 마지막 작품인 <밀밭 위의 갈까마귀 떼 >를 그렸던 밀밭이 나온다. 밀밭 길을 헤치고 나가면 고호가 작품을 그렸던  장소에 고호의 작품이 담긴 안내판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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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이 있는 곳에 서면 고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그린 진한 코발트의 빛 하늘을 배경으로 갈까마귀 떼가 나는 밀밭이 펼쳐진다. 밀밭에는 아름다운 고흐의 시선과 더불어 그의 외로움과 아픔이 진하게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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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밀밭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응시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강력한 색상과 꿈틀거리는 긴 터치로 그의 마음을 표현했다. 추수가 되면 곧 생명을 잃겠지만 그래서 더욱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 밀밭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이 길은 고흐가 걸어가야 할 죽음의 길이다. 푸르다 못해 검은 하늘 위로 두 무리의 구름과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보인다. 이것들은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죽음은 인간이라면 운명처럼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고흐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와 권총 자살한다. 그러나 동생이 소식을 듣고 올 때까지 죽지 못하고 있다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



고흐는 동생의 품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끝낸다. 고흐가 눈을 감은 뒤 그의 품에서 동생에게 보내려던 마지막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고통과 영원히 작별하는 날이다. 평생 나를 돌봐 주었던 테오의 품에서 마지막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내가 늘 말해왔고 다시 한번 말하건대 나는 네가 단순한 화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너는 나를 통해서 직접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나의 그림들은 남을 것이다. 나는 그 그림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것 때문에 반쯤은 미쳐버렸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너는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꾼이 아니다.


큰 캔버스 하나 살 돈이 없어 평생 가난했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정신병으로 지내야 했던 고흐는 살아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고흐는 가난과 병 그리고 무명 등 인간이 가져야 할 모든 불행을 안고 살다가 죽었다. 그가 남긴 전설적인 작품들 역시 그의 죽음과 함께 그대로 묻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도 사망한다.


그런데 고흐 사후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고흐와 테오가 죽고 나서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는 고흐의 작품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600통을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고흐는 단박에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의사 가셰의 초상>이 8천만 달러에 낙찰된다. 이는 당시 미술품 경매가 최고가로 생전에 단 한 점 밖에 팔리지 않았던 반 고흐의 그림이 세계 미술시장을 평정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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