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페르 라셰즈 산책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by 손봉기

런던과 파리 등 유럽의 대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도시의 소음과 혼잡함으로 지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도시 근교에 있는 시골 마을을 여행한다면 마음의 여유와 한적함으로 평화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만약 시간이 없는 여행자라면 파리 도심에 있는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를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아름다운 무덤 장식과 정원으로 마치 조각 공원을 둘러보는 것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는 페르 라셰즈를 방문한다면 소도시에서 맛볼 수 있는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였던 페르 라셰즈가 수도승들을 위하여 묘지터로 사용하던 곳을 나폴레옹이 구입하여 1804년 5월 21일에 개관한 페르 라셰즈 묘지는 7만 개의 무덤과 3만 개 가까운 유골함이 보관되어 있다. 처음 묘지가 들어섰을 때만 해도 파리와 떨어져 있어 빈민들만이 묻히는 공동묘지였지만 1817년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인 몰리에르와 라 퐁텐 등이 이곳에 묻히면서 묘지가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이후 유명인들의 묘가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페르 라셰즈는 연간 2백만 명이 찾는 파리의 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산책하다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은 발자크 무덤이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유명인들의 무덤을 직접 만나게 되니 내가 그 앞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설렌다.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발자크는 2천 명이 넘는 인물과 90여 편이 넘는 구성으로 <<인간 희극>을 발표하였다. 프랑스의 혁명기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발자크는 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세상은 끝냈지만 그 대신 물질적 탐욕과 출세를 갈망하는 신흥 부르주아가 지배하게 되는 세상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분의 지배가 끝나자 돈의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이를 발자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맨얼굴은 없고 가면들만 무수하다.



19세기 낭만주의 문학 사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사실주의 문학세계를 펼친 그의 작품은 근대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다가 다음으로 만나는 무덤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최고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의 무덤이다.



타고난 외고집 덕에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던 들라크루아는 열여섯 살 때부터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1832년 아프리카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그곳의 강한 색채의 영향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그의 대표작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화려한 색채를 보여준다.



왕당파를 무너뜨리기 위한 7월 혁명에 참가한 민중들의 모습을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에서 당시 유행했던 매끈한 선과 형태를 중요시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보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화려한 색채로 혁명의 생생함을 보여준다. 프랑스 낭만주의의를 대표하는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다.


1832년 프랑스혁명이 끝난 후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을 사들여 뤽상부르 미술관에 전시하였으나 7월 혁명으로 왕가의 자손이었던 루이 필립이 집권하자 이 작품을 철수시켜 지하창고에 버려두었다. 이후 1848년 민중들의 2월 혁명이 성공하자 공화국 정부는 이 작품을 다시 전시하였으며 오늘날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공화국 정신과 시민윤리를 교육시키는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은 들라크루아는 1850년대 중반부터 몸이 쇠약해졌으며 1863년 뜨거웠던 미술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은 세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들라크루아의 팔레트는 프랑스의 위대한 팔레트다. 그만큼 풍부한 색채를 사용한 화가는 이전에 없었다. 우리는 모두 들라크루아를 통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음으로 긴 목과 초점이 없는 눈의 초상화로 유명한 모딜리아니의 묘를 감상하자.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보낸 예술가이다. 화가가 되기 위해 무작정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온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에 정착하였지만 술만 마시면 테르트르 광장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 모습을 지켜본 피카소의 권유에 따라 몽파르나스로 거처를 옮긴 모딜리아니는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지금도 그가 단골로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카페 <로통드>의 가면 한쪽 벽면이 모딜리아니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는 19살의 미술학도인 잔느와 만난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잔느는 1917년 모딜리아니를 소개받고 그의 모델이 되었다. 이후 잔느는 모딜리아니에게 호감을 느꼈으며 깊이 사랑하게 된다. 이후 가톨릭 신자인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와 결혼하였으며 1918년 11월 29일 딸을 낳는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결핵 등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모딜리아가 술과 마약으로 겨우 연명하다가 1920년 1월 24일 3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당시 20살의 잔느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5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남편을 따라갔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아내 잔느의 모습을 보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길쭉한 얼굴과 애수 어린 표정 그리고 가늘고 긴 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눈동자 없는 공허한 눈과 둥글게 늘어진 어깨에서 삶의 무게와 외로움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들은 그들이 죽은 뒤 5년도 안돼 1,000배가 넘는 엄청난 가격에 팔렸으며 이를 두고 잔느의 부모는 그녀가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잔느의 부모는 딸이 죽은 지 10여 년 지난 후에야 모딜리아니의 옆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금 걸어가면 여성들로부터 인기가 많아 빨간 입술자국으로 뒤덮인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이 나온다.



의사이자 학자로 여왕의 주치의를 지낸 귀족의 아버지와 명문가 출신의 시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명석한 두뇌와 지적인 감각을 소유하였으며 큰 키에 미남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엄친아였다.



그가 옥스퍼드대 재학 시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지은 시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문단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며 졸업 후 뉴욕과 파리에서 미학 강의는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있다.


하지만 그의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 자녀가 둘이나 있던 오스카는 청소년들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고발을 당한다. 재판에서 달변으로 오히려 배심원으로부터 미움을 싼 그는 2년 강제노역형을 선고받고 실형을 살았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프랑스로 곧바로 추방당하였으며 가난에 시달리다가 뇌수막염으로 46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글에서 인생에 대한 그의 회한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나의 천재성을 헤프게 사용하였으며 젊음을 낭비하는 것에 야릇한 즐거움을 느꼈다. 정상에 있는 것이 지겨워진 나는 매일 감각적 즐거움을 찾아 깊은 구렁 속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고통을 맛보았다.



이제 쇼팽의 무덤으로 이동하자.



폴란드 출신으로 빈과 파리에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꽃피웠던 쇼팽은 파리의 마들렌 사원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의 장례가 치러졌으며 조국 폴란드의 흙과 함께 이 곳에 잠들어 있다. 그가 젊은 시절 빈을 떠나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유학하던 중 자신의 조국 폴란드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참히 진압당하였다. 이때 쇼팽은 러시아가 지배하는 조국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으며 결국 쇼팽은 죽을 때까지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음악이 매우 서정적이어서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이 파리에 왔을 때 파리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절정기였다. 당시 로시니와 벨리니 같은 오페라 작곡가가 스타덤에 있었다. 하지만 쇼팽은 묵묵히 피아노만을 고집했다. 피아노가 가진 온갖 가능성을 최대로 발굴하고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섬세한 방법을 이용해 시적 감정이 넘치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다. 200여 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마침내 파리 시민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파리 사람들은 쇼팽의 음악을 들으면 평화로운 숲 속에 새가 지저귀는 모습이나 강아지가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쇼팽은 그만큼 개성 넘치는 선율과 다양한 화성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모든 상황과 감정들을 묘사해냈다.



파리에서 음악적 성공으로 쇼팽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다, 바로 여걸 문학가 조르쥬 상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너무도 내성적이고 고독을 좋아하는 쇼팽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9년간 이어온 사랑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많았다. 상드와의 이별 후 쇼팽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빈혈과 후두염 같은 갖가지 병마가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그는 병마와 싸우느라 작품은커녕 레슨도 못하게 되자 급격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다 39세이던 1849년 10월 자신의 심장을 조국 폴란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페르 라셰즈의 산책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짐 모리슨의 무덤을 방문하자.



1971년 그룹 도어스의 보컬리스트인 짐 모리슨이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모리슨은 미 해군 제독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를 하는 바람에 늘 외롭게 지내다가 성인이 되어 로스앤젤레스 대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키보디스트인 레이 만자렉을 만나 도어스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인하여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서서히 흔들렸으며 진보적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반전운동이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는 국가와 기존 질서로 대표되는 일체의 권위를 모두 거부하는 히피 문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탐미적인 가사 그리고 말초적 감각을 건드리는 멜로디로 무장한 도어스가 나타나자 수많은 사람들은 열광했다. 당시 <라이트 마이 파이어>가 수록된 음반은 단숨에 차트 상위권에 올랐으며 잇달아 내놓은 <스트레인지 데이스>와 <웨이팅 포 더 선>등의 음반도 열광적인 인기를 끌며 모리슨을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모리슨은 얌전히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자유롭다 못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무대에서 거침없이 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그를 60년대 반항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후 모리슨은 공연 중 옷을 벗어던져 체포되기도 하였으며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팬과 동료 음악인과 거리낌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일찍 끝낸 것은 술과 마약이었다. 모리슨의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지만 이는 술과 마약에 기인했다. 지금도 그와 희피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밤마다 그의 곁에서 술잔을 기울이자 공원 측에서는 아예 바리케이드를 쳐서 이를 금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평화로운 무덤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많은 유명인의 무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현재 싸늘한 주검으로 남아있지만 불과 얼마 전에 우리처럼 열렬히 시대와 자신을 사랑하였으며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슬픔에 빠져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희비가 교차하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여행자는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우리에게 일상과 오늘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레지구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