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 피어난 아름다움
아를에 도착하여 기차역을 나서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론 강이 펼쳐진다. 하얀 방파제를 따라 론 강의 산책로를 걷다 보면 고흐의 작품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장소가 나온다. 방파제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작품과 실제 론강을 비교해보면 고흐에게 그림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자신의 감정임을 알 수 있다.
작품에서 코발트블루의 밤하늘은 단순한 붓질이 아닌 붓의 자루로 겹겹이 누른 듯 칠하였으며 별은 노랑과 흰색 튜브 물감을 짜서 표현하였다. 고흐는 아를에서부터 일반적인 채색 방법을 떠나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색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보이는 대로가 아닌 느끼는 대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편지에서 다음과 이야기한다.
나는 점점 인상주의자들의 기법이 아닌 단순한 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아볼 수 있게 그리고 싶다.
나는 내 눈 앞에 있는 것을 똑같이 재현하기보다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주관적으로 사용한다.
론강에서 다시 기차역을 지나면 고흐의 노란 집이 나온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폭격을 받은 노란 집은 현재 사라지고 없지만 뒤에 배경이 되는 건물들은 남아 있다.
1888년 아를의 정착한 고흐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화가 공동체의 설립을 꿈꾸었다. 그는 노란 집에 4개의 방을 빌려 친했던 고갱을 초청하지만 거절당한다. 하지만 화구상으로 당시 영향력이 있었던 동생 테오의 설득과 금전적 지원을 약속받으며 고갱은 아를로 내려온다.
고갱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는 기쁨으로 들뜨며 고갱의 방을 장식할 해바라기를 그렸다.
하지만 고갱이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생활은 곧 파국을 맞이한다. 이성적이고 냉정한 고갱은 감성적이며 변덕이 심한 고흐와 성격뿐 아니라 그림에 대한 생각들도 달랐다. 고갱이 힘든 동거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떠나려 하자 고흐는 그의 뒤를 쫓아가 고갱에게 남아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고갱은 이를 뿌리치고 집에서 10분밖에 되지 않은 기차역으로 떠나버린다.
고흐는 엄청난 실망감과 좌절로 자신의 귀를 자른 후 아를의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고흐의 노란 집을 벗어나 20분 정도 걸어가면 중세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아를의 구시가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를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있었던 곳으로 고대 로마 유적부터 중세의 건물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져 다양한 매력을 뿜어낸다. 특히 도심 중앙에 있는 원형경기장과 고대 극장은 로마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세기에 지어진 원형경기장은 검투 경기나 맹수와 사람과의 싸움을 제공하는 오락 장소로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하였다. 원래는 3층이었으나 지금은 2층까지만 남아 있는 경기장은 1883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현재 투우나 공연 그리고 축제 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기장에 입장하여 중세의 요새로 사용하기 위해 설치한 3개의 하얀 탑에 오르면 론 강을 배경으로 붉은 지붕으로 뒤덮인 아를의 아름다운 전경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원형경기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고대 극장은 기원전 1세기 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 만들어진 것으로 반원형의 관중석에 최대 1만 명의 관객들이 앉을 수 있는 대규모의 공연장이다.
로마제국이 쇠퇴한 후 주민들이 극장의 장식과 석재를 떼어내어 주택 건축에 사용하는 바람에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19세기 중반 대대적인 복원작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름이면 이 곳에 국제 사진축제와 영화제 그리고 민속축제 등이 열린다.
고대 극장을 나와 공화국 광장으로 가면 광장 한편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생트로핌 성당이 보인다.
프로방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손꼽히는 생트로핌 성당의 입구에는 <최후의 심판> 부조가 새겨져 있다. 부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예수 주위로 4 복음서의 저자인 천사 모양의 마테와 사자모양의 마가 그리고 황소모양의 누가와 독수리 모양의 요한이 보인다. 현재 이 조각들은 프랑스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공화국 광장에서 아를 시청사 쪽으로 내려와 조금 걸으면 포룸 광장이 나온다. 포룸 관장 한편에 고흐의 작품 <밤에 카페 테라스>의 카페가 보인다.
고흐는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푸른 밤에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위로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바로 이 곳에서 밤을 그리는 것은 나를 매우 기쁘게 한다. 창백하리만치 옅은 하얀빛은 그저 그런 밤 풍경을 제거해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작품을 위해서 검은색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파란색과 보라색 그리고 초록색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다. 특히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다.
카페에 앉아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다면 포룸광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에스파스 반 고흐로 이동하자.
이 곳은 고갱을 보내고 귀를 자른 반 고흐가 입원해 있던 병원이었으나 지금은 고흐의 자료전시와 아를의 예술공간으로 사용되는 <에스파스 반 고흐>라는 문화센터가 들어서 있다. 1889년 4월 이 곳에 입원해있던 고흐는 <요양소의 정원>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이후 정신병이 깊어진 고흐는 아를 근처에 있는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우리도 고흐를 따라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생레미 정신병원으로 이동하자.
생레미 정신병원은 16세기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가 탄생한 생레미 드 프로방스에 있다. 생레미 정신병원의 정식 명칭은 생폴 드 모졸 수도원으로 서기 982년에 문을 열었으며 1080년부터 정신 병원과 요양소로 운영되었다.
고흐는 사망하기 3개월 전까지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현재 고흐가 머물렀던 방은 전시 공간이 되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1889년 발작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지난 몇 주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이 대부분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조각들을 이리저리 다시 끼워 맞춰보려 했지만 다 부질없다. 문뜩 발작성 불안감이 휘몰아치듯 닥치곤 하는데 그러다가도 밑도 끝도 없는 공허와 허탈감이 밀려온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상 아무렇지 않게 멀쩡히 하루를 보내는 때도 많으니 내 걱정으로 너무 마음 졸이지 않았으면 한다. 적어도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내가 진정으로 이성을 잃은 건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창살이 있는 병동에서 하루 3번 이상 샤워할 것을 요구받을 정도로 정신착란 현상을 보인 고흐는 야외 생활이 금지된 상태로 자신이 이전에 그렸던 작품들을 모사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좀처럼 병이 낫지 않았다. 1890년 5월 이곳에서 더 이상 치료에 대한 희망을 잃은 고흐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휴양지인 파리 근교 시골마을인 오베르로 올라갔으며 그곳에서 2달 후 권총 자살하였다.
발작 상태와 예술 사이를 방황하면서 고흐가 이곳에서 완성한 작품이 <별이 빛나는 밤>이다.
작품에서 구름 아래 4개의 별과 구름 위 7개의 원형 별이 흩어져 빛나고 오른쪽 상단에는 가장 크고 밝은 별이 빛나고 있다. 작품의 아래에는 상단과 대조적으로 평온한 상태의 마을이 보이는데 마을 중앙의 교회 첨탑은 고흐의 고향마을 네덜란드를 연상시킨다. 작품의 왼쪽 편에는 하늘과 대지 사이에 마법의 성처럼 보이는 검은색의 거대한 사이프러스가 보인다.
서양에서 사이프러스는 나무를 자르면 다시 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죽음을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고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암시로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려 넣었다.
하지만 작품 전체의 아름다음으로 고흐가 이 작품을 완성하면서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먹먹한 마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킨다.
소용돌이치는 내 마음속의 폭풍은 언제 끝날까
그저 오늘도 나의 길을 혼자서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미로 속에
살아있다는 황홀감과 그보다 더 진한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외로움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를 채워줄 그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
먹먹한 마음으로 흐르는 눈물을 삼킨다.
소용돌이치는 내 마음속의 폭풍은 언제 끝날까
그저 오늘도 나의 길을 혼자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