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여행

국립 중앙박물관

과거이자 미래

by 손봉기

유럽을 여행하면서 영국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면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한다. 예를 들어 루브르 박물관의 경우 1 작품당 1분씩 감상한다 해도 6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래서 유럽의 박물관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효과적인 박물관 감상을 위해 박물관에서 꼭 보아야 할 작품과 동선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팁을 주었다.


용산에 있는 국립 중앙박물관 역시 유럽의 박물관 못지않는 규모를 자랑한다. 처음 박물관을 방문하여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서 하이라이트 작품 위주로 보았지만 하루 안에 관람이 끝나지 않을 것 않았다. 그래서 최종 보고 싶은 것만 추려서 관람을 했는데도 반나절 이상이 걸렸다.


그 이후로 국립 중앙박물관을 찾을 때면 박물관이 자랑하는 신라의 금관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그리고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을 제대로 감상하고 나머지 작품은 여유롭게 감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박물관의 상설전시관에 입장하면 고려시대에 만든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지금의 개성 인근에 세워져 있었던 석탑은 중국 원나라 영향을 받은 석탑으로 일반 돌이 아닌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웅장한 석탑을 뒤로하고 1층 전시실로 들어가면 주먹도끼로 상징되는 구석기 전시실과 빗살무늬 토기가 있는 신석기 전시실 그리고 무기와 농기구가 있는 청동기 전시실이 나온다. 그리고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면 처음 만나는 하이라이트 작품이 신라의 금관이다.



신라시대 왕비가 썼던 금관은 머리띠에 3개의 나뭇가지와 2개의 사슴뿔 모양의 화려한 장식으로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신성한 왕권을 상징한다. 금관은 국가의례 또는 제사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금관을 감상하고 2층으로 올라가면 불상들이 보인다.



신라시대 부모의 은혜와 임금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제작된 불상은 곧은 자세와 온화하면서 엄숙한 표정이 압권이다. 돌로 만든 불상 중 벽에 새겨진 불상은 대부분 보물이며 벽 없이 자체적으로 조각된 불상은 국보급이 많았다.


불상을 뒤로하고 2층 전시실로 입장하자 조선시대 서화의 향연이 펼쳐진다.



서화는 종이와 비단에 붓과 먹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시와 서예 그리고 화화로 완성한 작품으로 종이와 비단 위를 쓸고 간 붓 흔적과 색채의 완성도는 서양 회화 어느 작품 못지않게 감동을 준다. 특히 현실과 소망이 한데 뒤섞인 서화를 그렸던 작가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서화를 감상하다 보면 말할 수 없는 동양의 향기가 여행자를 감싼다.


서화 중 국립 중앙 박물관 특별전에서 보았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아직도 생생하다.



낙서처럼 장난스럽게 그린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도 찾지 않는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많은 이들은 이를 쓸쓸하고 높은 정신의 세계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귀양살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보일 뿐이다.


추사가 스스로 외로운 삶을 선택하고 저 고고한 아름다움을 그렸다면 지금까지 이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절벽 위의 한 송이 꽃처럼 외롭게 버티고 또 버티는 가운데 다가온 고고함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그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자연은 자연 그 자체일 뿐이다. 하지만 외로움과 실존에 목숨을 건 인간에게 자연은 최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서화 감상을 하면서 2층 전시실 끝으로 가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이 나온다.



대동여지도가 없을 때에도 조선에는 다양한 지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실용성을 지닌 지도는 서양의 지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세밀하고 완벽에 가까웠다. 하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목판에 지도를 새겨 인쇄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지도는 손으로 베껴서 사용하여 불편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정확성이 생명인 지도를 필사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일반 민중들이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목판에 지도를 새기고 22첩의 절첩식으로 만들어 필요한 만큼 언제든지 지도를 생산할 수 있게 하였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것을 국가나 관청의 도움 없이 김정호 혼자 힘으로 해 냈다는 점에 있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우리나라 지형과 산세의 특징인 산줄기를 끊어지지 않게 연결하였으며 높고 낮음은 선의 굵기로 표시했다. 또한 하천은 물줄기를 따라 곡선으로 표시했는데 하천의 굵기에 따라 이중선과 단선을 사용하였으며 도로는 하천과 혼동할 것을 염려하여 직선으로 표시하였다. 이는 산과 평지가 극단적으로 나눠져 있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 국토의 인문학적 특성을 매우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지도에 푹 빠져 있다가 박물관의 문 닫을 시간이 다되어 서둘러 3층으로 올라가서 반가사유상을 찾았다.



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서는 독립 전시실의 어두운 벽을 통과해야 한다. 벽을 통과하자 무대조명을 받아서 마치 허공 위에 떠 있는 듯한 반가사유상이 바로 내 눈 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벗은 몸이다. 벗은 상체 아래로 다리를 감싸고 있는 치맛자락은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의 모습을 보여주는 반가사유상의 얼굴에 보이는 가는 눈매와 양 눈썹에서 콧마루로 내려진 선 그리고 양 입가의 미소는 관람자로 하여금 명상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섹시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간결한 곡선으로 만들어진 몸매는 차가우면서도 이성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밀로의 비너스가 육감적인 몸매와 이성적인 얼굴의 조화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반가사유상은 육감적인 얼굴에 이성적이며 차가운 몸매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박물관을 나오기 위해서 2층으로 내려오다 조선시대 백자들을 만났다.



말할 수 없이 다양한 빛을 품고 있는 백자는 풍만하면서 기품 있는 양감과 싱그러운 곡선미로 여행자의 복잡한 심경과 스트레스를 한 번에 사라지게 한다.


특히 단순하면서도 많은 여백을 남긴 항아리의 표면에 거침없이 그어 내린 힘찬 선은 도공의 높은 경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며 여행자의 발걸음을 꼼짝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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