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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Aug 02. 2020

베르사유 궁전

내가 국가다.

결혼한 지 23년 동안 네 번의 유산 끝에 가진 자식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태어난 그는 부유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5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모든 것은 달라졌다. 아버지가 해오던 모든 국사를 어머니와 집사가 맡아서 진행했다.


당시 전쟁비용과 호화로운 궁전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그래서 어머니와 집사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많은 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귀족과 백성들 역시 빵조차 배불리 먹을 돈이 없었다.


백성들은 이제 그들의 생존도 보장하지 못하는 왕은  필요 없다며 궁전으로 쳐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었으며 어린 왕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공포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았으며 이때부터 파리는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1649년 1월 그는 어머니와 집사의 손에 이끌려 파리를 탈출하였다. 이후 그는 5년간 프랑스 각지를 떠돌면서 방치된 상태로 자랐다. 초라한 옷을 입었으며 제대로 먹지 못해서 뭐든 있는 대로 먹어야 했고 추위에 떨며 잠을 자야 했다. 하루는 연못에서 놀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어 익사할 뻔하기도 하였다.


1653년 프롱드의 난은 끝났다. 그 결과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에게 국왕의 억압은 참기 힘든 일이었지만 왕권이 무너져 귀족들이 득세하는 혼란은 더욱 참기 힘들었다. 차라리 왕이 다시 돌아오기를 모두 소망했다. 만약 왕이 돌아온다면 모두 충성을 다하도록 맹세하였다. 절대왕정의 서막이 올랐다.   

 

1661년 대리통치를 하던 재상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세 가지 정책을 펼친다. 먼저 자기 사람을 주요 요직에 기용하였으며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귀족 인증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절대 왕권을 보여주는 베르사유 궁전을 건립한다.    




루이 14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 프랑스는 현대 국가처럼 세금을 효율적으로 거두는 시스템이 없었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재상을 통해 거두어들였다. 국왕으로부터 조세의 권한을 위임받은 재상은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지방유지들로부터 필요한 세금을 먼저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이 낸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였다.


23세에 자기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루이 14세는 재상을 평민이자 자신의 사람인 콜베르에게 맡기며 자신이 직접 재원을 관할했다. 당연히 중간의 폭리를 취하던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힘이 약해졌으며 강력한 왕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국가 재정을 직접 관할하는 인적쇄신을 이룬 루이 14세는 귀족 조사 사업을 벌였다. 그는 자신들이 귀족이라면 이를 증명하는 문서들을 제시하라고 명령했다. 대귀족 들은 집안에서 내려오는 결혼 계약서와 국왕의 특권과 명예를 허락해준다는 교서 같은 문서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문서가 없는 하급 귀족들은 귀족 신분을 박탈당했다. 결과적으로 귀족수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이제 귀족은 왕의 인증을 받아야 했다. 귀족들은 왕의 은총을 갈구하면서 궁전으로 몰려들어 귀족이 되는 기회를 얻어야 했다.   


루이 14세는 마지막으로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을 지었다. 그는 어린 시절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 되었던 파리의 궁전을 버리고 아버지가 사용하던 사냥터에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 20년간 지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왕은 절대적 권력자가 되었으며 귀족은 국왕이 만든 엄격한 예법을 따르며 왕을 신처럼 떠받들어야 했다. 절대왕정의 바로크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유럽의 정치와 종교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기독교는 가톨릭과 신교로 나누어졌으며 가톨릭은 검소하고 소박한 신교에 대응해 화려함이 넘치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과 조각을 통해 우월함을 과시했다.


가톨릭의 바로크 양식은 절대 왕정이 수립된 국가로 전파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프랑스의 절대왕정국가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여 절대왕정의 위엄을 세우는 데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건물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철저한 좌우 대칭과 장엄한 U자 형태의 베르사유 궁전은 그 구조만으로도 사람들을 압도한다. 하지만 절대왕정의 위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베르사유 궁전 앞은 파리시를 향하게 있으며 궁전 뒤는 아폴론 분수와 신화 속 조각상이 있는 대규모의 정원을 두고 그 중심에 태양신인 아폴론의 보호를 받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궁전 내부 역시 절대적인 국왕의 힘과 권위를 보여준다. 본관의 중앙 2층에 위치한 거울의 방은 73미터에 이르며 17개의 창문과 거울이 있는 가장 화려한 방이다.




이 곳에 들어서면 수많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태양 빛이 커다란 거울과 샹들리에를 비추며 빛의 향연을 펼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연회를 베푸는 이곳의 천장에는 고대 신화의 영웅들이 있는 다른 방과 달리 태양왕 루이 14세의 모습이 있어 그가 신화 속 영웅 속에 살아있는 영웅임을 보여준다.


거울의 방 중앙에 있는 문을 통해 나가면 갑자기 왕의 침실과 서재가 나온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에 대한 과시로 베르사유 궁전 안에 왕들의 사생활 공간을 없앴다. 당연히 왕의 일상과 사생활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으며 왕의 침실마저도 귀족들의 접견실로 사용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매일 왕이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요란하고 복잡한 의례가 하루 종일 이루어졌다. 이를 부담스럽게 여긴 루이 15세와 16세 능  차츰 국왕의 사생활 공간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왕의 개인적인 침실 와 서재를 이곳 거울의 방 옆에 따로 마련하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곳 침대에서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침대 앞 나무 칸막이가 왕이 업무를 볼 때 업무보고를 하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마지막 경계였다.


당시 태양왕의 하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확히 8시 30분에 기상했으며 10시 정각에는 <거울의 방>에서 첫 번째 정무를 보았다. 그는 이곳에서 왕에게 청원을 하러 온 평민들을 만났다. 11시가 되면 <왕의 예배당>으로 건너갔다. 생 루이에게 봉헌된 이 예배당은 왕의 자리로 높이 솟은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다.


신하들은 복도에 서고 여인들은 특별석 주변에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미사가 끝나면 왕은 개인 거처로 돌아가 매일 열리는 국무 회의를 주재했다. 신하들과 함께 간소하게 점심을 든 후 공원 안을 오래도록 산책하였고 6시 정각에 돌아왔다. 그리고 살롱에서 담소와 알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하면 관람객들이 처음 접하는 장소가 왕의 처소이다. 왕의 처소는 대부분 왕의 접견실로 사용되는 방으로 7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헤라클레스의 방부터 시작한다.




왕실 예배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예배당으로 사용한 헤라클레스의 방에는 헤라클레스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신의 반열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그림이 천장을 장식하고 있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헤라클레스를 자신들의 조상인 골족의 왕으로 여겼다. 방의 모서리에는 왕의 4가지 덕인 힘과 인내 그리고 자치와 정의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보인다.




다음은 비너스와 디아나의 방이다. 과거 외국사절들은 대사의 계단으로 올라와 이 두 방을 지나야 지나야 왕을 접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두 방은 프랑스 왕의 위대함을 자랑하고 신격화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천장에 비너스의 모습이 있는 비너스의 방에는 루이 14세의 업적을 고대 영웅들의 무용담에 빗대어 묘사해 놓았다. 다음 방인 디아나의 방의 천장에는 사냥에 능했다는 루이 14세를 상징하기 위하여 사냥의 여신 디아나가 그려져 있으며 벽 중앙에는 루이 14세의 흉상이 있다. 당구를 좋아했던 루이 14세는 주로 이곳에서 당구를 쳤으며 그가 멋진 플레이를 할 때마다 신하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고 한다.




근위병들의 거처로 사용한 마르스의 방은 전쟁의 신 마르스의 이름처럼 붉은 벽지에 군사를 상징하는 그림과 부조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 방은 원래 의도와는 달리 긴 공간으로 인하여 음악회나 연회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다음 방은 상업과 과학을 주관하는 신 헤르메스의 방이다. 천장에는 헤르메스가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있으며 그 주위로 알렉산더와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둘러싸고 있는 작품이 그려져 있다.

 

왕의 처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방은 마지막에 있는 아폴론의 방과 전쟁의 방이다.




왕이 외국대사를 접견한 장소로 사용된 아폴론의 방의 천장에는 황금빛 태양 마차를 끄는 아폴로가 보인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루이 14세의 취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방은 왕의 처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소문날 정도로 금은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9년 전쟁의 비용을 대기 위해 장식품을 모두 처분하고 지금은 붉은 벽지와 루이 14세와 루이 16세의 초상화만이 남아 있다.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오른손에 지휘봉을 들고 있다. 이는 전군의 통수권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 아래로 왕관이 보이며 왕관 옆으로 손 모양을 한 지팡이는 정의를 상징하는 사법의 손이다. 배경에 있는 기둥은 절대 왕권의 힘과 권위를 상징한다.


루이 14세는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흰 백합이 장식된 최고급 옷과 반바지를 입고 있다. 이는 전쟁을 하기 위해 말을 타야 하는 필요 때문에 생긴 옷으로 후에 예복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그는 말을 타기 위한 빨간 뒤축이 있는 신발을 신고 있다. 이는 말에 오를 때나 말을 타고 전쟁을 할 때 몸을 고정시키는 발걸이인 등자를 이용하기 위해 만들었다.특히 빨간색 뒤축은 귀족의 상징으로 딸롱 루주라 불렸다.




왕의 처소에서 가장 끝에 있는 전쟁의 방은 국왕의 집무실이었다. 방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은 루이 14세가 정복한 나라들을 동물로 은유해 그린 것으로 독수리는 독일을 상징하고 사자는 스페인을 상징한다. 그리고 뒤집어진 사자는 네덜란드를 상징한다. 로마 신화에 마르스의 아내로 등장하는 벨로네를 주제로 한 그림도 보이는데 이는 거울의 방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하는 평화의 방과 대비되는 전쟁의 참혹함을 상징하고 있다. 이 곳은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루이 14세를 찬양하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전쟁의 방을 나와 거울의 방을 지나면 남쪽으로 평화의 방이 나온다. 평화의 방을 지나면 왕비 의거처가 나온다. 왕비의 거처는 왕비의 침실과 접견실, 근위대의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왕비의 방이다.


장미 향이 묻어날 것만 같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왕비의 방은 루이 14세 때부터 왕비의 침실로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루이 15세와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17명의 왕자와 공주가 탄생하였다. 프랑스혁명 이후 이 방의 가구들은 모두 경매에 부쳐졌는데 워낙 양이 많아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프랑스 정부는 1950년대부터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하와 귀족들이 자신이 옷을 갈아입는 것까지 공개하는 모습에 놀라워했다고 한다. 특히 진통부터 출산까지 전 과정을 신하와 귀족들이 지켜보는 관행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둘째부터 신하들의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종종 궁전을 떠나 별궁에서 생활하였다.


왕비의 처소를 나오면 대관식의 방이 나오고 이 곳을 지나면 베르사유 궁전 관람이 끝이 난다. 루이 필립이 나폴레옹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대관식의 방에는 나폴레옹을 모델로 그린 여러 점의 작품이 걸려 있다. 이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작품은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이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하는 장면을 담은 이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과 다른 점은 황후 조세핀 뒤로 서 있는 여자 다섯 명 중 중간의 여성이 흰색이 아니라 핑크색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나폴레옹 여동생인 폴린으로 다비드가 그녀를 좋아했다는 후문이 있다.




궁전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 관람의 진수는 여의도 면적의 3배가 되는 정원이다. 이 곳에 20만 그루의 나무와 산책로 그리고 운하가 조성되어 있다. 궁전 관람을 마치고 궁전을 나서면 광활한 정원 한가운데에 위치한 아폴론의 분수를 만난다. 이곳을 지나면 잔디밭이 나오고 잔디밭 끝에서부터 너비 62m 길이 150m의 십자가 모양의 인공 운하가 자리 잡고 있다.




운하 오른쪽으로는 루이 14세가 자신의 애첩인 맹트농 부인을 위해 지은 별궁인 그랑 트리아농이 있다. 그 옆으로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지은 프티 트리아농도 있다. 이 중 프티 트리아농을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장 좋아하였는데 그녀는 이곳에서 격식에 찬 궁정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 옆으로 전원생활을 좋아했던 그녀를 위해 만든 호수가 있는 왕비의 오두막도 있다.




왕실의 사치와 미국 독립전쟁의 지원으로 재정난에 처한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통해서 재정을 조달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하려 한다. 이를 도화선으로 1789년 7월에 프랑스혁명이 발생한다. 그 해 10월 파리의 부녀자들이 몰려와 루이 16세와 마리 앙드와네트 등 왕족들을 강제로 파리로 끌고 가면서의 베르사유의 절대 왕정의 시대는 끝난다.


이후,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의 전쟁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나자 프로이센의 황제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이런 굴욕의 역사를 복수하기 위하여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장식한 연합군은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이 곳에서 맺는 등 역사의 고비마다 베르사유 궁전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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